• 방랑자 ⑧  
      
     나는 낙천적인 성격이다. 또한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춥거나 배고픔 또는 잠자리의 불편함쯤은 얼마든지 견디어 낸다.

    조선 말기, 계몽운동기간에 겪었던 살벌한 환경, 탈옥했다가 사형수로 그 지옥과 같은 감옥서 생활을 하던 중에 오히려 감옥서 학당까지 만들어 놓았던 나다.

    그러나 내 일생에서 1912년 3월 26일, 조선 땅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미국 본토에서 방황했던 그 1년 가까운 기간이 가장 힘들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로 방황했기 때문이다.

    나는 집념이 아주 강한 성품이다. 고집도 세어서 한번 마음먹으면 거의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방황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가? 항상 그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렇다. 이번에 돌아가면 YMCA 교장 직책은 주지도 않겠지만 맡지도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리라. 틀림없이 잡혀가게 될 것이고 석방되면 또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시 감옥서에 간다. 굽히지 않을 것이니 내 앞날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조선 땅에는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 이제 며느리도 보냈으니 내가 옆에 있어야 도리 아닌가?

    지금 나는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 시간에도 조선 땅에 남은 동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또 하나의 다른 생각은 연해주나 만주로의 이전이다. 그것이 제 2의 방안이다. 그곳에서 동지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군대를 양성해서 일본군과 독립전쟁을 하는 것이다. 박용만과 함께 간다면 손발이 맞을 것이다.

    로스엔젤리스를 떠난 내가 매일 밥도 먹고 숨도 쉬었지만 유령같은 몸이 되어 워싱턴에서 머물고 있던 12월 초순이다. 그렇다. 목적 없는 방랑자는 유령이나 같다.

    위드로 윌슨은 며칠 전 선거인단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제 28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는데, 현직 대통령 테프트가 8표, 전직 루즈벨트가 88표를 얻은 반면에 윌슨은 435표를 획득했다. 두 전직 대통령에 원한이 있었던 조선 동포들에게도 후련한 결과였다.

    그날 저녁 8시, 코넷티컷 도로가에 자리잡은 매크린 카페로 들어선 나는 곧장 안쪽 방으로 다가갔다. 이곳에는 귀빈용 방이 두 개 있었는데 그중 「장미방」이 예약되어 있는 것이다.

    종업원이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토머스 웨스트만을 보았다.
    「어서오십시오, 이박사.」

    손을 내밀며 웃는 웨스트만은 40대 초반으로 윌슨 대통령의 개인 보좌관이 되었다. 나와는 서너번 만난 사이였는데 상냥했지만 앞뒤가 분명한 성품이다. 하버드 정치학 박사 출신이니 이제 물만난 고기가 될 것이었다.

    둘이 마주보고 앉았을 때 다가온 종업원에게 웨스트만이 주문을 했다. 내 의견도 물어보았지만 웨스트만의 일방적 주문이다.

    종업원이 물러갔을 때 웨스트만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대통령께서 각별한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나는 웃기만 했다. 비서실에 대통령 면담을 신청한 것이 이렇게 웨스트만과의 저녁식사 자리로 변경되었다. 물론 나도 자신이 백악관에 초대될 것을 바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이런 경우를 예상도 한 것이다. 어쨌든 어떤 경로를 통하든지 당선 축하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때 웨스트만이 말을 잇는다.
    「대통령께서는 이박사님이 당신과의 인연을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강조해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웨스트만이 정색했다.
    「물론 문서로는 보장시켜 드리지 못하지요. 이해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