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⑤  

     교회에서 조선의 풍습과 기독교 전파에 대한 강연을 끝냈더니 성금 12불 50센트가 모여졌다.
    필라델피아 변두리의 아담슨 교회는 내가 몇 번 들른 곳인데 오늘은 담당 목사가 바뀌었다.

    목사가 나에게 돈을 내밀면서 말했다.
    「리, 다음부터는 우리 교회에서 강연을 하지 않을 테니까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내 시선을 받은 젊은 목사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일본 교인들이 불평을 하는데다 다른 교인들의 반응도 좋지 않아서요.」

    내가 목사가 내밀고 있는 돈을 받으면서 말했다.
    「그동안 이 교회하고 정이 들었는데 섭섭하군요.」

    조선은 이미 일본령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특별히 조선 풍습만 이야기 한다는 것도 젊은 목사에게는 거슬렸을 것이다.

    교회 밖으로 나왔더니 갑자기 밝은 햇살을 받은 때문인지 현기증이 났다. 그래서 옆쪽 벤치로 겨우 다가가 앉아 눈을 감았다.

    1912년 7월 중순이다. 호주머니에는 오늘 받은 12불 50전에다 3불쯤 남아 있었으니 16불쯤 들어있겠다.
    그것이 인간 이승만의 전 재산이다. 교회에서의 강연이 내 주(主) 수입원이었는데 앞으로 어렵게 될 것 같다.

    5월에 미네아폴리스의 국제감리교총회에 참석한 후에 나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맴돌고 있다.
    내 아들 태산이 이곳에 있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루코는 이제 이곳에 없다. 일년쯤 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큰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안도감이 들었는데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으면서도 안도감이 들다니. 내 이중성이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박사님.」
    앞에서 부르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동양인 사내 하나가 서 있다. 조선말을 했으니 조선인이다. 단정한 양복 차림에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부드럽다.

    사내가 말했다.
    「저는 청주에서 온 김기중이라고 합니다. 미국에 온지 10년째로 필라델피아에서 정육점을 하고 있지요. 누추하지만 제 집으로 모시고 싶습니다만.」

    순간 나는 목이 메었다. 김기중은 이 교회에 다니는 교인일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나한테 어떻게 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다. 아마 조선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벤치에서 일어선 내가 김기중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제가 오늘 어디 갈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김선생의 고마운 초대를 받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김기중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쥔 내가 말을 이었다.
    「부디 교회 열심히 다니시고 조선말 잊지 마십시오.」
    「예. 박사님.」

    김기중도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더니 말을 잇는다.
    「부디 기운 내시고 박사님이 건강하시기를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기중과 인사를 마친 나는 발을 떼었다.

    이제 필라델피아를 떠나리라.
    김기중의 초대를 사양하면서 내 결심이 굳어졌다.
    내 교육과 꿈의 터전이 되었던 필라델피아. 내 자식이 묻혀있는 땅 필라델피아.
    이젠 이곳을 떠나 새 땅을 개척해야 될 것이다. 그것은 독립의 발판이 되어야 할 땅이다.

    나는 주머니에 든 16불을 갖고 필라델피아를 떠났다.
    태산이의 묘비 앞에 꽃 한송이는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