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②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총회에 나는 조선평신도 대표로 참석했으므로 조선의 교직자 대표로 참석한 노블(William A. Noble)과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노블은 내가 배재학당에 입학했을 때 처음 만난 선교사로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이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내가 프린스턴 박사 학위를 받은데다 조선평신도 대표까지 되었으니 감개가 일어났으리라.

    어느 날 저녁, 둘이 숙소의 방에 남게 되었을 때 노블이 나에게 말했다.
    「리, 요즘 정신이 다른 데로 가 있는 것 같구만. 강연할 때와 혼자 있을 때의 분위기가 아주 다르네.」

    둘이 같은 방을 쓰는데다 내 내력을 훤하게 꿰는 노블이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갈등과 초조함, 망설임을 눈치 채었을 것이다. 그 날이 총회가 끝난 날이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조선 땅 안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보다 밖에서 활동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리, 그것이었군.」
    노블이 놀라지도 않고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노블은 선교사다. 나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지만 독립운동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친일적 행위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중립적 자세로 보았다.

    노블이 물었다.
    「그래서 결심을 했나?」
    「아직 못했습니다.」
    정직하게 말한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간도나 연해주로 달려가 박무익, 김일국과 합류한다면 당장 입지는 굳혀질 것이다. 그리고 싸움에 몰두하게 되겠지. 독립지사가 모이는 상해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수도 있다. 그곳에서 중국과 러시아 인사들과 연합하여 세를 키우는 것이다.

    그때 다시 노블이 말했다.
    「리, 자네의 능력을 적소에 사용하도록 하게. 총을 쥘 것인가? 조직을 키울 것인가? 또는 신망을 얻을 것인가?」
    머리를 기울이던 노블이 말을 멈추고는 나를 보았다.

    노블의 시선을 받은 내가 숨을 멈췄다. 과연 내가 무엇을 잡아야 할 것인가? 내 능력은 어느 곳에 가까운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담겨져 있던 창고의 문이 열린 것 같다. 내가 불쑥 말했으니까.

    「조선왕은 민중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왕이 욕심을 조금만 버렸어도 조선 땅이 식민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가?」
    노블이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내 말에는 열기가 띄워졌다.

    「동학난때, 갑오경장때 또는 을미사변때라도 개혁을 했더라면 일본놈들이 쉽게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지난날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싫다. 그러나 그 잘못을 인정해야 진보한다.

    내가 말을 이었다.  
    「조선 민중이 하나로 뭉치도록 할랍니다. 새 시대, 새 나라에 대한 희망을 품도록 하겠습니다.」
    「새 지도자에게도 말인가?」
    불쑥 노블이 물었으므로 나는 시선을 들었다.

    내가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나는 아직 부족한 인간이다.

    내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조선이 망한 이유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블은 입을 다물었고 나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조선을 떠날 때 이미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그날 저녁, 노블과의 대화로 내 결심을 굳어졌다. 노블이 우연히 꺼낸 대화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꼴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