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단련 (21) 

    아카마스의 외동딸 하루코는 작년부터 프린스턴에서 가까운 필라델피아로 옮겨와 있었다.
    하루코는 필라델피아 거주 일본인 부녀 모임의 총무에다 일본 대사관에서 개설한 유아원 원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사관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나는 아카마스가 죽기 전에 하루코를 보살피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카마스는 그것으로 자신의 꿈이 일부분이나마 성취되는 것으로 느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물론이고 하루코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하루코를 이용하여 일본인 사회에 진입할 의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루코 또한 일본화(化)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하고 하루코와의 관계는 순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쌓여졌고 의지가 되었다. 그러나 서로 결합되지 못할 처지임을 아는 터라 열정을 다스렸으며 그것이 가슴을 메이게 만들었다.

    한때 불길 같았던 때도 있었지만 감옥서 생활 5년 7개월, 거기에다 미국 생활까지 4년이 넘게 겪다보니 나는 누르고 인내하는 습성을 갖추게 되었다. 태산의 죽음이 감성(感性)에 면역을 준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날 하루코를 만났을 때 내가 물끄러미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하루코, 난 박사 과정을 마치면 조선 땅으로 돌아 갈꺼야.」

    늦은 봄날의 저녁 무렵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찾아온 하루코를 맞은 나는 프린스턴 신학교 캠퍼스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바람결에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하루코의 체취다.

    하루코는 잠자코 바라만 보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내 동지들은 제각기 갈 길을 찾아가고 있어. 어떤 이는 의병이 되겠다면서 만주 땅으로, 또 어떤 이는 군자금을 모으겠다고 하와이로, 또 다른 사람은 러시아로 떠났어.」

    김일국이 만주로 떠난 것은 작년 1908년 12월이다. 조선 땅에서 격렬하게 의병과 일본군과의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역부족이다. 시바다가 말한대로 일본군의 전력만 강화시켜 병탄의 시기만 당겨지는 것 같다.

    그때 하루코가 낮게 물었다.
    「선생님은 조선으로 돌아가 의병을 이끄실건가요?」
    「필요하다면.」

    나는 무력을 기피하지는 않는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사용할 것이다.

    다시 하루코가 말을 이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어요.」
    「널 위험한 상황에 두지는 않겠어.」
    「저는 아버지하고 달라요. 제 조국은 선생님과 같은 조선입니다.」

    하루코의 목소리가 떨렸고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미 주위는 어두워져서 잔디밭 건너편의 도서관 불빛이 차츰 환해지고 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순간 하루코의 아버지 아카마스가 이런 상황까지 예상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하루코를 부탁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선인 여자로 하루코를 받아들여 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손을 뻗어 하루코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찼으므로 나는 두 손으로 덥히듯이 감싸 안았다.

    「하루코, 내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가 않아. 네가 가장 잘 알겠지만 만리타국으로 찾아온 내 아들 하나마저 내팽개친 채 죽인 놈이야.」

    하루코의 시선을 받은 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네 진정에 가슴이 뜨겁지만 너까지 희생시키기는 싫구나. 하루코.」

    그때 하루코가 상체를 던지듯이 내 품에 안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