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③  

     우선 숙식부터 해결하려고 워싱턴 대학 기숙사로 옮겨간 나는 하루를 시간별로 쪼개어 사용했다.
    아직 밀서를 전하지 않은 터라 딘스모어의 연락을 기다리는 한편으로 김윤정의 도움을 받아 국무장관 헤이의 일정을 체크했고 또 새 학기에 맞춰 개강 준비를 했다. 영친왕 이강도 자주 김일국을 보내 정보를 건네주었으며 주말에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던 2월 하순의 어느 날 아침, 나는 딘스모어와 함께 국무부 청사 안으로 들어섰다.
    금요일이다. 제물포항을 떠난 것이 작년 11월 4일이었으니 1백여일 만이었다. 내 옆에는 통역관으로 김일국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격식에 맞다고 이강이 조언해주어서 김윤정에게 청을 넣은 것이다.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는 웃음 띤 얼굴로 우리를 맞았는데 친절했다.
    인사를 마친 우리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나는 황제의 밀서를 헤이에게 건네주었다.

    국무장관실에는 다섯명이 모여 앉았는데 딘스모어는 대기실에 남아 있었으므로 나와 김일국 그리고 헤이는 보좌관 버튼, 국장 윌리암을 대동했다. 밀서를 편 헤이가 시선을 떼지 않고 끝까지 읽고 나서 머리를 들었다.

    「잘 알겠습니다. 이 밀서를 대통령께 전해 드리지요.」
    정중하게 말한 헤이가 밀서를 다시 접더니 보좌관에게 넘겨주었다.
    그때 내가 말했다.
    「국무장관님. 대통령님을 만나게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만.」

    헤이의 시선과 마주치자 나는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통령께 대한제국의 실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노력 해보지요.」
    나는 그렇게 말한 헤이가 소리죽여 긴 숨을 뱉는 것을 보았다.

    내가 말을 이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속국이 되면 동북아에서 일본세는 크게 팽창될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미국의 안보에도 위협이 될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러시아를 깬 일본이 대한제국의 속국화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주와 중국 동부를 석권하면 동남아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하면서 헤이가 부드러운 웃음을 띄운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가 인사를 나누고 밀서를 읽은 후에 이렇게 끝날 때까지 30분은 넘은 것 같다. 헤이는 비공식 밀사인 나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시간을 내 준 것이다.

    헤이와 인사를 마친 내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딘스모어에게 가기 전에 혼자 화장실에 들렀다. 그리고는 문을 잠그고 변기 위에서 혁대를 풀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사내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가 루즈벨트가 우리 헤이한테 이야기 한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이 되었을까?」
    그렇게 말한 목소리는 국장 윌리암같다.
    「뭐라고 했는데?」
    하는 목소리는 보좌관 버튼 비슷했다.

    그러자 윌리암 목소리가 대답했다.
    「루즈벨트가 말했어. 우리는 일본을 거스르면서까지 대한제국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가 않아요. 대한제국은 자신들의 방어를 위해 주먹 한번 휘두를 능력도 없는 제국이요. 우리가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나설 이유가 있습니까?」
    윌리암 목소리가 루즈벨트 흉내를 내는지 굵어져 있다.

    그러자 버튼 목소리가 짧게 웃었다.
    「하긴 그래. 아까 그 친구가 안됐어.」

    나는 변의를 잊은 채 망연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