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45주년 추도식과 우남상 의미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45주기 추도식이 지난 7월19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렸다. 이날 추도식에는 각계를 대표하는 많은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매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분들도 계셨고, 건국 지도자가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듯, 진작에 오셨어야 할 분들이 참석한 경우도 있었다.

    참석자들 중에는 당일 아침 한 유력 일간지에 실린 ‘건국 대통령 동상이 없는 것을 개탄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읽고 동감하는 마음으로 참석한 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에 취임 후 국회에다 구국기도회를 두셨던 분이다.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이 일을 기억해서인지, 매년 추도식은 개신교 목사님이 주도하고 있다. 백발의 장로님들이 엄숙한 분위기로 하는 추도 특송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 추도식의 백미는 따로 있었다. 유력한 정치 지도자 한 분이 우리 역사상 가장위대한 지도자를 알아봤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김문수 경기도지사였다. 그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며 눈물 머금은 추도사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추도식에 참석한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10년 전만 해도 추도식을 무슨 잘못된 일을 숨어서 하듯 마냥 조용히 간신히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한미연합사령 부사령관(Douglas O. Fegenbush JR)까지 참석하였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입니다.”

    주변에 있던 참석자들이 그 말을 받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네. 정말 많이 달라졌죠.”
    “그런데 올해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 박사님 어록이 새겨진 부채 하나씩을 나눠 주더군요” “그런데 부채는 누가 만든 건가요?”
    “작년에 모 일간지에서 ‘7부 능선에는 적이 없다’라는 책을 낸 적이 있는 전직 의원 같아요.”
    “그럼 꼭 참석하셔야 할 분들이 참석을 안 하신 것 같네요.”
    “네 그런 것 같은데요. 지난달 김문수 지사님이 ‘이승만과 6.25’라는 연극을 만든 분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그 뒤로는 못 뵈었습니다.”
    “그래요. 지난달 이맘때쯤, ‘건국대통령 이승만’ 관련 연극이 처음 공연될 무렵, 연극 관계자 20여 분이 함께 관람을 했었죠.”

    그렇다. 한달 전 대학로에 있는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정진수 연출의 ‘이승만과 6.25’ 가 무대에 올랐다. 연극 내용은 연출자의 설명대로 한국 현대사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관람한 분들 모두가 매우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최근엔 100주년 기념으로 ‘안중근 의사의 불멸’ ‘이순신 장군의 영웅’ ‘세종대왕의 찬란한 유산’ 등이 오페라나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몇 년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이 들어섰던 곳 바로 앞의 이화 100주년 기념관에서 ‘손탁호텔’이라는 오페라 공연이 있었다. 손탁호텔의 주인과 독립운동을 하는 서재필 박사의 이야기였다. 그 오페라 때문은 아니더라도, 후에 워싱턴에는 건국 대통령보다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의 동상이 먼저 세워졌다. 이처럼 근래 들어 영웅이나 지도자가 새롭게 조명돼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새삼 각인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미술계의 큰 행사장을 방문해 봐도 외국의 지도자나 연예인 또는 동식물을 모델 또는 소재로 삼을지언정, 우리나라 지도자를 테마로 한 작품은 보기 드물었다. 지난 봄 코엑스에서 있었던 G20현직 대통령과 함께 참여국 지도자 초상화에 부처님 얼굴 모양 철망을 씌운 풍자적인 작품이 전시됐을 뿐, 이승만 박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나마 국가의 체면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것은 몇 년 전 배재대학교에 새로 세운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건립된 것이었다. 필자는 지면을 빌어 동상 건립을 가능케 한 정 순훈 총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작년 추도사를 읽으셨던 한 목사님이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인재를 양성하고 이승만은 인재양성을 등한히 했다”고 언급한 대목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드러낸 어이없는 편견일뿐이었다. 이 박사는 6.25 전쟁 중에도 인재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낸 지도자였다. 1950년 6월25일 갑작스런 남침으로 나라의 안위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인재를 챙겼던 분이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집에 불이 났는데도 자식한테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며 손에 학비를 쥐어주어 공부를 하라고 외국으로 보낸 셈이었다.

    반면에 최근 감명 깊게 본 ‘포화 속으로’라는 영화가 있었다. 절박한 상황을 지도자와 함께 온몸으로 겪은 학도병과 관련한 실화였다. 영화는 6.25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가 되고 부산만 남은 상황에서 국군이 낙동강 전선을 힘겹게 사수하던 때를 다룬 것이었다. 병력이 태부족이었던 그 상황에서 포항 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 수백 명을 14살부터 19살 사이의 학도병 72명이 온몸으로 막아낸 과정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는 이제는 노년기에 접어든 학도병 생존자 몇 분의 인터뷰가 담겨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관객이 없었다.

    그 때 온몸으로 나라를 지켰던 영화 속 주인공들 가운데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분이나, 국비로 유학을 갔던 분이나, 아니면 그 자녀들만이라도 내년 추도식에는 꼭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이승만이라는 지도자가 얼마나 초인같이 버텨냈는지를 안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공연된 ‘이승만과 6.25’라는 연극은 정말 의미가 컸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이런 작품은 부디 재 공연되기를 바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그것도 5년이 넘도록 운영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콜로퀴엄이 있다. 이곳에서는 기존 책자나 자료에서는 보기 힘든 생생한 경험담이나 체험을 소재로 한 강연도 자주 열렸다. 필자는 그처럼 귀한 강연을 듣기 위해 몇 년간 거의 매달 참석한 바 있었다. 역사학자들의 세계를 소상히는 모르는 필자였지만, 그러한 모임일수록 좌파 성향 인사들의 공격을 견딜 수 있는 특별히 검증된 사람이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처럼 오랜 세월 건국 지도자를 홀대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전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을 깨우친 한 기업인이 ‘이승만 연구소’를 만들라며 50억원을 쾌척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자금이 기부자의 뜻대로 사용되는지 성과가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 가운데 몇 분의 십시일반 지원으로 재원이 턱 없이 부족한 형편 속에서 매달 강연 장소나 연사를 섭외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좌파 성향 인사들의 수많은 공격까지 방어하고 견뎌내야 했으니, 그것을 운영해온 분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청렴함이 검증되고 이런저런 흠결이 없었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그러한 속사정을 감안해보면, 이 박사 기념사업이 그나마  명맥을 이어온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과거 야당 국회의원 시절, 대통령과 여당을 상대로 한 공격의 최선봉에 서는 일이 많았다. 그 무렵 필자는 한 국회의원을 인터뷰하면서 “다른 의원들도 많이 있는데, 무슨 폭로나 공격 때면 왜 김문수 의원만 나서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의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한 답변은 이러했다.

    “야당에는 여당이나 대통령 친인척 관련 제보들이 수시로 접수됩니다. 물론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이런저런 자료를 수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언론 인터뷰나 대정부질문 등을 통해 표면화 하는 데는 다들 주저주저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수사권이 없는 야당으로서는 적시에 공세를 취하면서 여론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법인데, 이를 떠맡을 공격수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검찰 경찰 국세청 등 사정기관을 거느리고 있는 여당을 상대로 그러한 공격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공격수 자신이 꼬투리 잡힐 게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이라 해도, 개인적인 여러 문제 등에서 조금이라도 캥기는 게 있으면 살아 있는 권력을 상대로 공세를 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김문수 의원은 그러한 측면에서 공격수로 나서기에 적합한 분이라고 보면 됩니다. 생활이나 기타 모든 환경에서 흠결이 없기 때문에 대통령과 청와대, 여당과 당당히 맞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당시 인터뷰를 통해 필자는 김문수라는 정치인이 청렴하고 도덕적으로도 검증이 된 드문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받은 바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을 터트릴 때도 그것이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상황을 막으려면 정치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하고, 그것을 통해 꾸준히 준비하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이치도 새삼 깨달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하지만 재선이 된 지금도 김문수 지사를 이념적으로 어딘가 미심쩍게 보는 사람들이 없지 않는 게 사실이다. 노도조합운동을 활발하게 벌였고 민중당에 몸담았던 과거 경력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 같은 불안하고 불편해하는 인식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한 사람으로 부각된 것은 정치인 김문수의 저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보는 요즈음이다.

    이승박 박사는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그래도 내가 대통령인데 양말까지 뜯어진 것을 기워서 신으라는 것은 너무 하지 않느냐”고 항변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박사는 그처럼 청렴한 지도자였다. 그러한 이 박사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콜로퀴엄을 5년 동안 이끌어온 분이나, 늦게 와서 미안하다면서 추도사를 한 분 모두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결코 퇴색하지 않는  신념의 지도자 이승만을 얘기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지도자를 알리고 자 애쓰는 사람이 또 한분 있다. 평생 법을 가르치던 한 교수는 법과가 없는 프린스턴에서 몇 달씩 머물며 개인적으로 ‘이승만 박사 연구’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로 가을에 열릴 세계인물 학회에서 발표자로 선정되셨기에 ‘이승만 박사님’주제 발표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올해 프린스턴대학에서 기대되는 일이 또 있다. ‘이승만 박사님 100주년 기념’으로 몇몇 뜻있는 분들이 정성을 모아 대학 내 건물에다 ‘이승만 박사님실’이나 ‘이승만 장학기금’둘 중 하나를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대학 측과도 상세하게 결정하지 않은 과정 중에 있고 국내 분위기도 이러한 상황이라 이 단계에서 과연 모금이 될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오히려 의외의 호응에 주최 측이 놀라워 하는 분위기다. 이 여세를 몰아 10월 중엔 프린스턴대학 동문이 모여 이 일을 제대로 알릴 행사도 기획하고 있다는 동문회장의 언질이 있었다 

    반면에 추도식에 참석한 한 인사가 ‘어제 하루 종일 아프리카의 모 대통령과 같이 있었다’는 이야기도를 들었다. 그렇다면 그 아프리카 대통령을 이 박사의 추도식에 참석시킬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우리나라의 건국 지도자를 알릴 자연스런 계기가 됐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전날 일정을 마치고 귀국토록 했다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지난 100년, 아니 향후 100년 동안 좀체 만나기 힘든 지도자를 만날 기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서 내내 아쉬웠다. 외국 대통령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이승만 박사와 같은 훌륭한 정치 지도자의 통찰력을 배울 수 있다면 자국의 발전을 몇 십년은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우리의 현대사가 바로 살아있는 역사 체험현장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전기 작가로 유명한 조갑제 대표는 강연 때 ‘박정희와 이승만 중 누가 더 위대한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필자도 강연에 참석했다가 직접들은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도 대단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이승만 박사”라는 것이 조갑제 대표의 답변이었다. 나라를 이끌어갈 정도의 인재는 어느 날 불숙, 예수가 재림하듯 나타나는 게 아니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키워놓은 인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발전된 대한민국은 불가능하다는 취지가 연상 되는 답변이었다.

    추도식 다음날 유력 일간지 1면 한 가운데 김문수 지사의 얼굴이 실렸다. 그 전날 열린 추도식 기사가 이렇게 크게 났나 싶어서 보았더니, 경기도에 무슨 일자리를 늘리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날 뉴욕에서 온 예술계의 유명 인사부인 인터뷰에 참석했던 기자 10분의 1 정도 인원이 관심을 갖고 예우했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문화의 개념이 차차 뿌리내리면서 국내에는 백 여개 넘는 개인박물관과 문학관이 세워졌다. 심지어 우리의 정체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평생을 외국에서 보낸 미술가나 음악인을 위한 기념관도 멋들어지게 세워졌다. 예술가를 위한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풍성해지는데도. 정작 나라를 세운 건국 대통령은 제대로 된 기념관 하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올해로 삼년째를 맞이하는 우남상의 첫해 개인 수상자는 한국논단 월간지를 발행하는 이도형 대표였고, 두 번째로 상을 받은 분이 바로 조갑제 대표였다. 건국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우남 애국상을 이번에는 풍선 날리기의 주역 이 민복씨가 그 영광을 안았다. 애국자나 훌륭한 지도자는 노벨상이 정해주는 게 아니다. 우리의 건국 대통령부터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훌륭한 지도자였음을 깨닫고, 우리국민은 물론 세계인들을 상대로 이승만이라는 지도자를 두루 알리고 또 자랑해야 한다. 이번 우남상 수여식과 추도식 통해 거듭 드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