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대역죄인(大逆罪人) (23)

     임병길(林炳吉)은 나보다 7살 연상으로 군부(軍部) 정위(正尉)였으니 무관이다.
    또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인터라 나하고 막역했던 사이였다.

    내가 투옥된 후에 임병길은 만민공동회 동지들과 함께 조병식, 신기선 등의 저택에 폭탄을 투척하고 내란을 모의하던 중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모습은 각양각색이겠으나 임병길은 죽기 전날 밤까지 나하고 시(詩)를 지었다.
    서로 시를 주고받다가 문득 창살 밖을 보았더니 달이 밝았다.

    내 시선을 따라 달을 보던 임병길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우남, 조선은 곧 멸망할 것이네. 그러니 그대가 내 대신 힘껏 일 해주게.」
    「지난 번에 최정식 형도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고 가십디다.」

    그렇게 대답했던 내가 길게 숨을 뱉았다.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형님, 가시기 전에 부모처자 걱정을 해야 인간 아닙니까? 가족에게 남길 말씀은 없으시오?」
    「없네.」

    임병길이 머리를 젓길래 내가 말을 이었다.
    「내가 나가면 형님과의 이야기는 꼭 글로 남기겠소. 남기실 말씀이 계시면 하시오.」

    감옥서장 김영선의 호의로 우리는 사형수의 방에 둘이 마주앉아 있다.
    비록 목에 칼을 쓰고 팔다리는 묶였지만 임병길의 표정은 평온하다.

    내 시선을 받은 임병길이 빙그레 웃었다. 달빛을 받은 흰 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언젠가 조선이 새로 태어난다면, 나 임병길이가 한덩이 거름 역할을 했다는 것만 적어주게.」
    「그러지요.」
    「이씨 왕조가 일본에 의해 멸망당하는 꼴을 안보고 가서 다행이라는 말도 남겨주게나.」
    「머릿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돌린 임병길이 창살 사이에 낀 반달을 보았다.
    「나중에 주권(主權)을 찾거든 제 일신의 영달을 꾀한놈만 제하고 모두 싸 안아야하네. 그래야 발전이 되네.」

    나는 숨을 죽였다. 가장 과격한 성품의 임병길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예상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전하지요.」

    방안에 잠시 정적이 덮여졌다.
    이제 나는 임병길의 입에서 가족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듣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임병길이 달을 향한 채로 말했다.

    「우남, 여백(餘白)의 미(美)를 찾게나.」

    나는 눈만 크게 떴고 임병길의 말이 이어졌다.
    「남기는 아름다움이 더 깊고 은근한 법이지. 그대는 너무 완벽한 것만 추구하고 있네.」

    내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같이 시작(詩作)을 하면서 임병길은 내 시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詩)란 곧 그 인간의 품성(品性)이나 같다.
    길게 숨을 뱉은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그날 밤 임병길은 끝내 가족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내 감방에서 눈을 뜬 나는 임병길이 이미 처형당한 것을 알았다.
    시신도 이미 거적에 말려 실려 나갔으므로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임병길의 말은 내 가슴에 깊게 남았다.

    포용과 여백의 미.
    나는 지금 이 글을 애국자 임병길의 자손에게 유언으로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