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대역죄인(大逆罪人) ⑧ 

     일본은 왕실과 개화파 양쪽을 교묘하게 관리했다.
    갑신정변때는 김옥균, 박영효 등을 지지했지만 민비의 요청을 받은 청군이 밀려오자 교전 중에 후퇴 해버리는 바람에 혁명은 3일 천하로 끝났다.

    그 후 민비를 시해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다가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허를 찔리자 다시 물러서는 척 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세력이 확산되어 고종이 수세에 몰렸을 때는 일본공사 가토가 메이지유신의 예를 들면서 고종에게 군대 동원을 권고했다. 그들에게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가장 위험한 민중조직일 것이었다.

    그 한편으로 박영효의 거사를 지원한 것은 민중세력과 떼어낸 상태에서 조종하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박영효의 거사가 성공했다면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민중 운동가였기 때문에 일본측이 철저히 제거 작전으로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주시경이 찾아왔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면회가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특별 취급을 받았다.
    면회실에는 간수도 따라 들어오지 않는다. 둘이 마주보고 앉았을 때 주시경이 말했다.

    「박선생이 권총 두자루를 준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총알 6발을 다 채운 권총 두자루를 내일 나한테 건네주기로 했습니다.」
    박선생은 박무익이다.

    내가 머리만 끄덕였을 때 주시경이 말을 잇는다.
    「동지들한테 연락을 했는데 닷새 후인 30일 오후 다섯시에 종로 거리로 모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시경은 1876년생이니 나보다 한 살 연하였지만 치밀하고 학구적인 성품이다.
    호는 학신(學愼)이며 한글에 대한 연구는 조선 제일이다.
    나와 배재학당을 같이 다닌데다 협성회 회보도 함께 만든 각별한 사이인 것이다.

    내가 입을 열었다.
    「이보오, 학신(學愼). 혹시 우리가 탈옥하고 나서 순검들에게 시달릴지 모르니 권총은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주시오.」
    「믿을만한 사람을 찾아보지요.」
    「학신은 군중 동원에나 진력해주시기 바라오. 5백명은 확실하지요?」
    「확실합니다. 그런데 괜찮겠소?」
    하고 걱정스런 얼굴로 주시경이 물었으므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30일날 오후 다섯시경에 군중들만 모인다면 해볼만하오. 그것으로 불씨를 만들어서 해체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다시 부활시킬테니까.」

    주시경과 헤어진 내가 방으로 돌아오자 최정식과 서상대가 잠자코 시선을 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최정식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한다.

    「내 식객 최학주가 내일 면회 오기로 했으니 그자에게 학신을 찾아가 권총을 받으라고 하겠네. 그리고나서 30일날에 최학주가 권총을 가져오면 되겠구만.」
    「최학주는 믿을 만 합니까?」
    내가 묻자 최정식이 길게 숨을 뱉는다.

    「내 먼 친척인데 꽤 오랫동안 내 집 식객으로 지냈네. 내가 이렇게 되니까 그 은혜를 몸으로 갚는다면서 지성으로 면회를 오는 사람이지.」
    「권총을 전해주고 피하라고 하시오.」
    「그래야겠군.」

    말을 맞추고 났을 때 듣기만 하던 서상대가 불쑥 묻는다.
    「이공께서는 탈옥해서 곧장 종로로 가신다니, 최공은 어떻게 하시겠소?」
    「나는 떠날겁니다.」

    최정식이 외면한 채 말을 잇는다.
    「연좌법(連左法)으로 가족이 다 잡혀 죽을지 모르니 내일 미리 피란을 시킬 작정입니다.」

    순간 내 가슴이 내려앉았다.
    봉수엄마와 봉수,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