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대역죄인(大逆罪人) ② 

     제중원(濟衆院) 원장 에비슨은 내 상투를 잘라준 사람이다.
    나는 에비슨한테서 영어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그리고 세계정세에 대해서도 습득(習得)을 했다.
    말 그대로 익히고 얻은 것이다.

    특히 나에게 감명 깊었던 에비슨의 이야기는 미국 사회였다.
    그곳은 직업에 귀천이 없으며 능력에 따라 사람이 인정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바탕이 되어있는 교육제도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에비슨의 사택에 은신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늦은 저녁 무렵, 에비슨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리, 미스터 박의 거사가 또 실패했소.」

    내 앞의 의자에 앉은 에비슨이 조선말로 말했다. 미스터박이란 박영효를 말한다.

    「친위대 장교들이 배신해서 고발을 했답니다. 지금 체포령이 떨어져 성안은 난리가 났소.」
    에비슨은 「난리」라는 표현도 유창하게 한다.

    내가 잠자코 있는 것이 이상한지 에비슨이 묻는다.
    「리, 그자들과 연관(聯關)이 있소?」
    「그렇다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하긴 미스터 박을 대신으로 추대 했으니 그럴만 하지.」

    그리고는 에비슨이 입맛을 다셨다. 행동까지 조선사람 다 되어있다.
    「리, 당분간 이곳에 박혀 있으시오. 한바탕 휩쓸고 가면 곧 잠잠해질테니까.」

    또 입맛을 다신 에비슨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미스터 박은 친일 세력이니 조정에서 끝까지 일본파를 추적하지는 못할 것 아니겠소?」
    「잘 아시는군요.」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운다지 않소?」
    「읊는다고 합니다.」
    「읊는다는건 무슨 말이오?」
    「노래 한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문득 가슴이 막힌 내가 머리를 들고 에비슨을 보았다.
    「에비슨 박사, 조선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에비슨이 눈썹만 모았으므로 내가 다시 묻는다.
    「당신은 나보다 안목이 더 넓습니다.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부디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오.」
    「미스터 리, 나는...」
    「부탁합니다. 그러면 내 답답한 가슴이라도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러자 에비슨이 잠자코 나를 보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에비슨과 나는 마주보며 앉아있다.

    창밖은 어둡다. 밤 10시쯤 되었을 것이다.

    내 나이 스물다섯, 만으로는 스물네살이 되었다.
    4년 가까운 세월에 격랑속으로 뛰어들어 힘껏 배우고 싸웠지만 나는 마치 대해(大海) 속에 떠도는 조각배 같다. 키도, 노도 없이 떠도는 조각배.

    그때 에비슨이 입을 열었다.
    「조선은 자력(自力)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나는 숨을 죽였고 에비슨은 천천히 머리를 젓는다.
    「아무도 없소. 조선을 도와줄 나라는 아무도 없단 말이오.」

    나는 겨우 참았던 호흡을 했고 그때 갑자기 눈이 뜨거워졌다.
    이제는 나도 조금은 안다. 강대국들의 약육강식, 절대로 손해보지 않으려는 뒷거래, 약소국은 그저 미끼나 흥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내 표정을 본 에비슨이 위로하듯 말했다.
    「리, 기다리시오. 희망을 잃지 않으면 기회는 꼭 오는 법이오.」

    그때 내 눈앞에 인화문 밖에 모여 있던 군중이 떠올랐다.
    밤을 새우며 함성을 외치던 군중들은 이제 다 흩어졌다.
    불과 며칠 전이었지만 옛날 일 같았다. 주위가 조용해서 그런가보다.

    이윽고 내가 머리를 들고 말했다.
    「예, 기회는 우리가 만들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