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25) 

     예상은 했지만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줄은 몰랐다.
    여인은 허신행의 외사촌 동생, 오목사의 딸 오선희였다.

    「어서오세요.」
    다가선 오선희의 흰 얼굴이 어둠속에 또렷하게 드러났다.

    「폐를 끼치게 되었소.」
    민망해진 내가 외면한 채 말했더니 오선희가 손으로 안채를 가리켰다.

    「안방으로 드시지요. 곧 저녁상을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둡고 추운데다 이미 집안까지 들어온 터에 사양은 허식일 뿐이다.
    나는 잠자코 마당을 건너 안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방안은 따뜻했다. 구들장도 따끈하게 덥혀져 있어서 저절로 긴 숨이 뱉아졌다.

    마당에서 떠들썩한 재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석도 마음이 기쁜 것이다. 그래서 문규에게 실없는 말을 던지고 있다.

    지난번에 오선희가 머물 곳을 주선해 주겠다는 곳이 이곳일 것이었다.
    얼었던 몸이 풀리면서 깜박 앉은채로 졸았던 나는 방문이 열리는 기척에 눈을 떴다.
    오선희가 종과 함께 밥상을 함께 들고 들어선다.

    「아니, 이런.」
    꼭 목사댁 외동딸이라서가 아니다.
    대접이 과분하게 느껴진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더니 오선희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처음이어서 술상도 같이 차렸습니다.」
    밥상에는 술병도 놓여져 있다. 밥상을 내려놓은 오선희가 종과 함께 나가면서 말했다.

    「같이 오신 손님은 행낭채에서 먼저 잡숫고 계십니다. 그럼.」
    「고맙습니다.」

    나는 이런 대접이 계속된다면 며칠 묵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에는 오랜만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나물에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기구이에 전도 놓여졌다. 고깃국의 은근한 향내에 저절로 침이 넘어갔으므로 나는 서둘러 수저를 들었다.

    인간 심리는 묘하다.
    그때 내 머리에 본가(本家)의 식구들이 떠올랐다.
    아버지, 봉수엄마, 봉수, 집에서 나온 지 두달 가깝게 된다.
    그동안 양식과 땔감은 대었지만 고깃국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살림이다.

    그러나 나는 곧 정신없이 밥을 먹는다.
    밥에 곁들여서 술병에 담아온 매실주를 두잔이나 마셨더니 적당하게 취기가 오른다.
    그야말로 등 따숩고 배부른 것을 실감한 것이다.

    상을 물린 내가 벽에 기대앉아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면서 오선희가 들어왔다.
    오선희는 치마 저고리에 버선발 차림으로 머리는 짧게 양갈래로 묶었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내가 인사를 했더니 오선희가 앞쪽에 무릎 하나를 세워 앉으면서 웃는다.

    「제가 모셔서 영광입니다.」
    내 시선을 받은 채로 오선희가 말을 잇는다.
    「선생님께선 우리 여학생들한테 가장 인기가 있는 분이시죠. 알고 계세요?」
    「모르겠는데요.」

    당황한 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금시초문이다. 요즘들어 여학생 관중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안다.
    이화학당에서 토론회 모임이 있겠다는 말도 들었다.
    그 때 오선희가 다시 물었다.

    「저희들한테 시간을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의 개혁 강의를 듣고 싶거든요.」
    오선희의 눈동자가 등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이윽고 내가 머리를 저었다.
    「시급한 일이 있어서 요즘은 어렵습니다.」
     
    내 가슴이 미어졌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마치 칼날 위를 걷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