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⑲ 

     다가선 사내가 목례를 하더니 말을 잇는다.
    「저는 궁내부의 김모(某)라고 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못함을 용서 해주십시오.」

    자신을 김 아무개라고 한 것을 용서 해달라니 나는 그냥 용건을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부르셨소?」
    「긴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가까운 여관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김모가 손을 들어 거리 옆쪽을 가리켰다.
    종로 양쪽으로는 제법 번듯한 여관이 몇 채 있었는데 지방에서 상경한 관리나 상인, 외국인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여관 안으로 들어갔는데 겉보기와 달리 안이 넓었다.
    김모는 이곳에 익숙한 듯 하인을 제 집 종 부리듯 하더니 사랑채 옆 서양식 다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다실 앞에서 재석이 자신은 여기에 있겠다는 눈짓을 했지만 나는 머리를 저어 보였다.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다.
    재석은 이미 내 분신같은 경호원이다. 증인 겸 상담자 역할을 바란 것 같다.

    다실은 비어 있었다. 다탁을 중심으로 넷이 마주보며 앉았을 때 김모가 먼저 말했다.
    「이의관께 청이 있습니다.」

    내 시선을 받은 김모가 말을 잇는다.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오늘 일은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실 수 있습니까?」

    「나도 먼저 물읍시다.」
    김모의 말을 자른 내가 물었다.
    「이것이 누구의 지시인지를 말해주시오. 누가 귀공들을 보냈습니까?」
    「그건 말씀 드릴수가 없습니다.」

    정색한 김모가 똑바로 나를 보았다. 30대 후반쯤의 단정한 용모에 언행이 바르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을 겪은 품격이 느껴진다. 이른바 다스리는 이들의 분위기다.

    김모가 말을 이었다.
    「허나 제가 드리는 말씀은 황제 폐하의 뜻이나 같으며 이공의 응답도 곧 폐하께서 아시게 되리라는 것은 말씀 드릴수 있습니다.」

    길게 표현했지만 황제의 밀명을 받고 왔다는 말이었다.
    이윽고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말씀 들어 봅시다.」

    그러자 김모의 시선이 재석을 스치고 지나갔다. 옆에 앉은 재석이 몸을 굳히는 것도 느낄 수가 있었으므로 내가 말했다.
    「내 분신이나 같은 사람이오. 괜찮소.」

    「그럼 말씀 드리지요.」
    정색한 김모가 말을 이었다.
    「한성부 종5품 판관 직이 비었습니다. 이의관께서 승낙만 하시면 바로 직을 받으실 수가 있지요.」
    「......」
    「잠깐 판관으로 계시다가 의정부나 학부, 또는 지방 수령으로 옮겨 가실수도 있습니다.」
    「......」
    「이미 중추원 의관직으로 품계를 받으셨으니 옮기시는 것도 자연스럽고 누구도 시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더니 김모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웃는 것 같지만 눈빛이 강해서 왠지 섬뜩하다.

    「이공께서는 더 큰일을 하셔야 합니다. 황제 폐하와 대한제국을 위하여 더 힘껏 일할 수 있는 직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광영이 어디 있습니까?」
    「과연 그렇습니다.」

    김모의 시선을 받은 내가 마침내 머리를 숙이고 사례했다.
    황제의 배려가 전해졌으니 이래야 옳다.
    머리를 숙인채 내가 말을 이었다.

    「황공한 분부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러나 며칠 말미를 주셨으면 합니다. 과분한 배려이시라 생각을 정리해야 되겠습니다.」

    그렇다. 안재훈의 제의도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