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⑭ 

     춥다.
    저녁 무렵, 인화문 밖 광장에 모인 5백여명의 백성들도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그러나 나를 향한 눈빛은 생생(生生)하다.
    하긴 저런 눈빛이 없었다면 이 추위를 견디지 못했으리라.

    남녀노소(男女老少)의 강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목청껏 소리쳤다.
    「여러분! 뭉쳐야 합니다! 조선민중이 뭉쳐야 삽니다! 사농공상이 한마음으로 새 세상을 만들어 가야만 합니다! 하늘아래 모든 백성이 평등한 세상! 탐관오리가 없는 새 세상을 맞으려면 우리는 뭉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는 이때부터 뭉치자는 표현을 썼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내가 24세때인 1898년에 나온 것이다.

    신기료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이 끝났지만 민심은 아직도 흉흉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들이 중추원 의관직에 올랐다고 해서 민심이 쉽게 가라앉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때 초점이 잡힌 내 눈동자가 군중 사이에 선 여자를 식별 해 내었다.
    오선희다. 오선희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었고 장옷으로 머리부터 상반신을 코트처럼 덮었지만 얼굴은 다 드러났다.

    오선희의 흰 얼굴과 두 눈에서 쏘아진 시선이 군중들을 넘어 날아와 내 눈과 통했다.
    나는 잠깐 말을 멈추고는 입안의 침을 삼켰다. 그 순간 온몸의 열기가 무섭게 생성되는 것이 느껴졌다. 뜨겁고 거친 열기다.

    「조선 백성들이시어! 개혁을 위해 뭉칩시다!」
    나는 목이 터져라고 외쳤다. 그러나 다음순간 외친만큼 허무함이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목표가 없는 외침이다.
    즉 구심점이 없다.

    「황제」를 중심으로 뭉치자고 했다면 임금은 기뻐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는 못하겠다. 임금은 나름대로 구실이 있겠지만 개혁 운동을 사사건건 방해해왔다.
    절대로 왕조의 권력을 놓치지도 않았고 그나마 놓쳐선 안되는 세상이기도 했다.

    내가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연단을 내려왔을 때 박용만이 다가왔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다.
    「형님, 명연설이요. 형님은 명 웅변가가 다 되셨소.」
    다가선 박용만이 소리치듯 말했으므로 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내 연설을 마지막으로 군중들은 흩어지고 있다.
    옆을 지나던 군중들이 나에게 소리쳐 인사를 했고 몇 명은 환호했다.
    감동한 표정들이었지만 내 가슴은 더 내려앉았다.
    오늘은 더 그렇다. 중추원 의관직에 오르고 나서 마음도 조급해지고 있다.

    「누가 조선을 이끌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잇사이로 말했으므로 박용만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귀를 귀울이는 시늉을 하며 옆으로 바짝 붙는다.

    「형님, 뭐라고 하셨소?」
    「개혁의 지도자가 필요하단 말이다.」
    내가 소리치듯 말했을 때 박용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선뜻 입을 열지는 않는다.

    개혁이건 무엇이건 간에 지도자는 응당 임금이 되어야만 한다.
    더욱이 나는 중추원 의관 아닌가? 관인(官人)인 것이다.

    그 때 뒤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개혁의 지도자는 추대하면 되지 않겠어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선희다. 나는 얼굴을 보지 않았어도 알았다.

    그러나 박용만의 얼굴은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불경(不敬)한 발언이다. 더욱이 여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이미 주위는 비어져 있었고 다가온 오선희가 내 옆에 섰다.
    광장 끝 쪽에는 이제 셋이 모여서 있다.
    그때 오선희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리고 임금께서 그 지도자께 전권을 맡기셔야 합니다.」

    이제는 내 얼굴도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