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⑬ 

     나는 열넷이 되었을 때(1889)부터 과거가 폐지된 갑오개혁(1894)때까지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낙방했다. 서당 때 장원을 도맡았던 터여서 매관매직이 성행한 시기였으니 시험관만 매수했다면 진작 벼슬길에 나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관찰사는 10만냥, 목사는 5만냥 등 대놓고 벼슬을 사고팔았으며 그렇게 돈을 들여 부임한 관리들은 단시간에 부은 돈을 회수한다. 언제 후임이 치고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끼어 죽는 것은 백성 뿐이다.

     임금은 모르는 일이었다고 핑계만 대면 안된다.
    임금이 곧 주인인 세상이었으니 권한과 함께 그렇게 된 모든 책임을 져야만 옳다.

    내가 보는 조선은 썩었다.
    러시아 대사관을 나온 임금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했지만, 청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 뿐이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굴레를 벗기도록 만들어준 일본은 쓴웃음을 짓지 않았을까?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난장이가 왕관 대신 황제의 관을 바꿔 쓰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았을 수도 있겠다.

    개혁이 시급하다.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에 성공한 일본과 조건이 같지는 않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시간이 급하다.

    나는 황제치하의 대한제국 체제에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무력에 의한 개혁 또한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때는 즉시 일본이 개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임금이 요청하지 않더라도 바로 조선 땅을 점령할 수가 있는 것이다.

    12월 초순, 눈발이 흩날리는 저녁 무렵에 내 숙소로 박무익이 찾아왔다.
    방으로 들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랑채 옆 담장 안쪽에서 우리는 마주보고 섰다.
    마당 구석에는 박무익의 수하 한명이 서서 경계를 한다.

    박무익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임금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수장(首長)이 나주 목사를 지냈던 이익치라는 놈이오.」
    박무익이 어둠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생포한 김시준이 죽기 전에 자백을 했습니다. 이익치는 임금이 준 풍부한 군자금으로 수백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더니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한다.

    「이익치의 주요 목표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간부이며 특히 이번에 중추원 의관이 된 인물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나으리가 목표중의 한분이시오.」
    「그자들이 날 어떻게 한다는 것이오?」

    쓴웃음을 지은 내가 묻자 박무익이 목소리를 낮췄다. 
    「감시하고, 회유하고, 필요하다면 암살까지 할 것입니다. 김시준은 살려준다고 했더니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박무익이 정색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익치는 이미 개화파 각료와 독립협회 간부 몇 명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다고 했습니다. 약점을 잡은 것이지요. 죽은 김시준은 그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른답니다. 나으리께서도 조심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고맙소.」

    한숨과 함께 내가 머리를 숙여 박무익에게 사례를 했다.
    중추원 의관이 되었으니 이젠 드러난 목표가 되었다.
    이때 박무익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얼굴을 짓고 물었다.

    「나으리, 전(前) 충주목사 오석구 영감의 여식과 요즘 만나십니까?」
    외면한 채 박무익이 서둘러 말을 잇는다.
    「김시준이 알고 있었으니 이익치 수하들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조심하시지요.」

    나는 어금니를 물었다. 이것이 염문이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