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⑳

     졸업식에서 나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영어 연설을 했다.
    제목은 『조선의 독립』이었는데 축하하러 온 왕실과 고관, 외교 사절들을 자극하는 발언은 들어있지 않았다.
    창립자인 아펜젤러와 교수진들은 나에게 신문명(新文明)과 개혁에 대한 기초, 그리고 열망(熱望)을 주입시켜준 은인인 것이다.
    제국주의시대에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중이었지만 나는 은인의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만큼 무모하지도 않다.

     고종 34년(1897) 7월 8일이었다.
    졸업식을 마친 내가 식장인 정동성당 밖으로 나왔는데 윤치호가 다가왔다.
    윤치호는 나보다 10살 연상인 1865년생으로 올해 나이는 서른셋이다.
    서재필보다 한 살 연하가 된다. 현재는 학부협판(學部協辦)이다.

    「훌륭했어.」
    다가선 윤치호가 칭찬했다.
    지나치던 고관들도 웃음 띈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렇다. 연설이 끝났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일어났다.

    나는 고관, 각료들의 얼굴에서 조선인에 대한 자부심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서양 외교관들 앞에서 조선 학생의 우수성을 증명한 셈이리라.

    윤치호가 말을 잇는다.
    「앞으로 조선을 개혁하는 운동에 그대가 적극 참여 해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내가 마침 지나치는 각료 이완용에게 머리를 숙였다.
    윤치호도 이완용에게 목례를 한다.
    이완용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파를 몰아내는데 앞장을 섰던 각료중의 하나다.

    나는 윤치호의 안경 쓴 옆모습을 보았다.
    이사람 또한 서재필과 같은 유학파다.
    갑신정변에 연루되자 곧장 상하이로 피신, 중서서원에서 3년을 공부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벤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영어와 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2년 전인 고종 32년(1895)에 귀국한 것이다.

    그때 윤치호가 말했다.
    「나도 독립협회, 독립신문 일에 앞장을 설 작정이야.」
    「당연히 그리하셔야 됩니다.」
    그러자 윤치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서양식 악수에 익숙해진 내가 손을 쥐었을 때 윤치호가 빙긋 웃는다.

    「친일, 친러, 친미로 아직 갈라놓지는 말게. 훗날 역사가 평가 해줄테니까.」

    몸을 돌린 윤치호가 사라졌을 때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기석이 다가왔다.
    오늘 기석은 말쑥한 양복 차림에 새 중절모까지 썼다.
    구두도 새것이어서 고관대작들 사이에서도 어울렸다.

    「나으리, 훌륭하셨습니다. 저는 영어는 한마디도 모르지만 너무 잘 하셨습니다.」
    준비해온 듯이 서둘러 말한 기석이 힐끗 내 뒤쪽을 보았다.

    「조금 전에 나으리 옆으로 지나가신 대감이 이시다하고 친했지요.」
    「누구말이냐?」
    내가 뒤를 보고나서 다시 묻는다.
    「나하고 이야기 했던 어른인가?」
    「아닙니다. 손잡이가 은으로 된 지팡이를 들고 계셨던 분.」

    이완용이다.

    이번 파천에서 친일파를 몰아낸 주역 중 하나가 이시다하고 친했다니.
    내 표정을 본 기석이 말을 잇는다.

    「아주 긴밀한 관계였습지요. 둘이 여러 번 만나 밀담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때 문득 윤치호가 조금 전에 한 말이 떠올랐으므로 내가 심호흡을 하고나서 말했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뒷날 밝혀질테니까 말이야.」
    그대 정장 차림의 화이팅이 다가왔으므로 기석이 슬그머니 물러섰다.

    화이팅의 뒤에는 노블과 에비슨이 따르고 있다.
    그들을 본 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들이야말로 훗날 평가가 필요없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