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⑬

     제중원(濟衆院)의 여의사 파이팅(Georgiana E. Whiting)한테서 연락이 온 것은 다음해인 고종 33년(1896) 2월 중순이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상경하라는 전갈이었는데 나도 평산에서 들었다.

    임금이 2월 11일 새벽에 태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한 것이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따라서 석달 전 춘생문 사건에 실패한 친러, 친미 세력의 재 시도가 성공한 셈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자리잡은 임금은 친일관료의 숙청을 지시했는데 영의정을 지냈으며
    의정부 대신으로 있던 김홍집이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죽고
    정병하, 어윤중 등 대신들도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이제 친일파로 불린 요인들은 죽거나 유배되었고
    유길준 등 몇 명은 운 좋게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김홍집의 친일 내각은 무너졌다.

    제주도로 유배당했던 이충구도 돌아와 경무사(警務使)가 되었다.
    김홍집내각이 백성들의 공분을 산 이유는 국모 시해에 대한 원한이 몰린데다
    작년 말의 단발령으로 분노가 거듭 폭발했기 때문이다.

    특히 단발령에 대한 반발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차라리 머리털 대신 목을 자르겠다.」
    면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돌아온지 며칠 후에 집으로 찾아온 이충구가 말했다.
    「이형, 벼슬길에 나가시지 않겠소? 만일 이형께서 동의하신다면 내가 적극 주선하리다.」

    이충구는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같지않았다.
    갑자기 더 커진 것 같다.

    저녁무렵이다.
    안방에서 아들 봉수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가 어르고 계실 것이다.
    아내와 복례는 부엌에서 저녁을 짓고 있겠지.
    아버지는 어제 또 해주의 친구댁에 가셨지만 모처럼 집안 분위기가 밝아졌다.

    다시 이충구가 말을 잇는다.
    「임금께서 러시아 공사관에 계신 동안은 안전하오.
       우리는 그동안에 왕권을 더욱 강화하면서 조선을 개화시켜야 하오. 이형, 도와주시오.」

    「나는 백성들과 함께 돕지요.」
    내 말에 이충구가 눈을 둥그렇게 뜬다.

    「백성들과 함께 돕다니? 무슨 말씀이오?」

    「직은 받지 않고 일 하겠단 말씀이오.」

    「허, 새로운 동학이라도 만드시려고?」

    웃음 띈 얼굴로 말한 이충구가 목소리를 낮춘다.

    「친일 내각이 타도되었지만 일본은 쉽게 조선 땅에서 물러가지 않습니다.
       군대도 그대로 있고 일본공사는 아직도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있소.」

    「제중원에서 들었는데 러시아와 일본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하오.」

    내가 말하자 이충구가 코웃음을 쳤다.

    「일본놈이 감히, 러시아의 국력과 군사력은 일본의 열배가 넘소.」

    맞는 말이다.
    일본은 신생국이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의 상대가 안된다고 제중원 의사들도 말했다.

    상반신을 세운 내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파천(播遷) 이후로 민심이 조금 안정된 것 같아서 다행이오.
       그러니 나는 마치지 못한 공부를 끝내겠소.」

    그리고는 덧붙였다.
    「이제는 이형이 찾아 오시기전에 내가 앞장 서 뛰겠소.」
    「그래 주신다면.」

    흡족한 표정이 된 이충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저녁을 같이 먹자면서 잡았지만 사양한 이충구는
    예의 바르게 안방 어머니께 인사를 마치고 돌아간다.
    경무사 제복이 썩 어울렸고 문 밖에서 기다리던 부하 병졸들도 군율이 잘 잡혀져 있다.

    나는 멀어져가는 이충구의 등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충구는 충신이다.
    임금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