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은 태평양 전쟁의 원인(遠因)이 되었고, 급기야 일본의 패망에 이른다.”

  • ▲ 허문도씨 ⓒ 뉴데일리
    ▲ 허문도씨 ⓒ 뉴데일리



    허문도(許文道) 전 통일원장관은 월간조선 3월호(망국체험 100년 특별연재)에서 이 같은 주장을 제기하여 국내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부터 ‘파리강화회의’ ‘워싱턴회의’까지 숨어있던 국내외 자료들을 분석하여 ‘3.1운동이 불지른 국제정치의 역학적 결과물’을 동태적으로 해석한 결론을 내놓아, 국내학자들이 눈돌리지 않았던 3.1운동의 세계사적 의미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올해는 3.1절 91주년. 집회시위 연인원 202만3098명, 사망 7509명, 부상 1만5961명, 체포자 4만9811명, 불태운 건물 민가715호, 교회당 47동, 학교 2동의 수난을 감수해야했던 민족독립운동이다.

    그동안 국내학계가 3.1운동이 가져 온 일제식민통치의 '문화정치', 임시정부 수립등 국내적 변화에만 갇혀있던 연구지평을, 허문도씨는 일본과 식민주의 강대국들의 새로운 세계질서 재편에 이 운동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입체적 채굴작업을 가함으로써 ‘역사를 보는 눈’을 생동하는 글로벌 다이나미즘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주목한 자료들은, 일본의 <쇼와천황 독백록(獨白錄)>을 비롯하여 미국과 일본의 외교정보 기록, 미국의회 기록, 당시 당사국들의 언론보도, 학자들의 저술등이다.

    그러면 3.1운동이 어떻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을까.
    월간조선에 게재한 허문도씨의 논문을 줄거리만 요약 정리한다.

    1. ‘3.1운동 탄압’이 일본의 ‘인종 평등’ 가면을 벗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일본은 국제연맹 규약안에 “인종차별철폐”를 규정하는 ‘인종평등안’을 넣자고 주장한다. 이는 미국의 일본인 이민 거부 등을 겨냥한 것이었다.
    바로 3.1운동이 터진 한달 뒤의 일이다.

    이때 미국대표단은 “일본이 통치하는 조선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인종평등’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넌센스”라며 냉소에 붙인다. 

    또한  미국언론은 “일제, 빠르게 가면을 벗고 있다”는 제하에 “3.1운동을 탄압하고 있는 일본이 자유스런 이민의 권리를 위해 인종평등안을 내놓은 것은 문제도 안된다”고 보도했다.
    정작 일본자신은 중국인의 이민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조선과 대만에서 지역민보다 일본인이 우대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일본의 주장은 ‘일본인 우대’를 요구하는 것이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난했다. 일본의 제안은 없던 일이 된다.

    2. 윌슨, 민족자결주의 부메랑에 맞아 쓰러지다

    민족자결주의를 외친 윌슨 미국대통령은 그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들고 일어난 조선민중의 3.1운동 함성에 발목이 잡힌다.
    1919년 4월 파리 강화회의를 리드하면서 국제연맹창설을 추진하던 윌슨은 미국의회 공화당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윌슨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조약을 독일이 수락하도록 필사적이다.
    그러나 그 조약은 독일이 차지하고 있는 산동반도를 중국의 희생아래 일본에 내주는 부당한 것이다. 일본은 산동반도 역시 식민지화할 것이고, 그 식민지배는 조선의 3.1운동에서 명백해진 바와 같이 가혹한 일본의 탄압이 될것이다. 윌슨은 이런 일본과 타협하려는 것인가.“

    되풀이 되는 미국의원들의 반대연설에는 일본의 조선통치 문제점, 3.1운동 진압의 잔학성, 제암리 교회의 학살방화등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 강조되었다.

    “조선인은 윌슨 대통령이 구해줄 줄 믿고, 가망없는 소요를 일으켜 수많은 희생자를 낸 반면에, 국제연맹은 조선인을 구해주는 게 아니라 3000만명의 중국인(산동성)을 또 일본지배에 내주려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 조셉 프란스 의원의 비판연설에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미-조 우호조약 제1조의 '주선' 조항에 의거하여, 고종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을 미국이 막아달라고 호소했으나 미국은 이를 외면하고, 일본의 조선 병합을 방관한 과거와 마찬가지로 3.1운동 진압의 참상이후에도 조선인의 요구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당시 미국에서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승만, 서재필등의 활동상을 엿보게 하는 대목들이다.
    윌슨의 국제연맹 가입안은 1920년 3.1운동 1년 만에 미국의회에서 부결되었다.

    3. 일본, 조선을 빼앗기지 않으려 미국에 백기 들다

    윌슨에 이어 1921년 집권한 미국 공화당의 하딩 정권은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등 8개국을 불러 ‘워싱턴회의’를 연다.

    이 회의는 1차대전후 미-영-일의 군함톤수를 5:5:3으로 확정한 자리였지만,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일본의 팽창욕을 대폭 제한한 것에 있다.

    일본은 이 회의에 ‘조선문제’가 상정되는 것을 적극 저지해야만 했다.
    이때 미국내 한국독립운동 열기도 달아올라 있었다.
    미국인들의 조직 ‘한국인의 벗’의 보고서에 의하면, 1년동안 미국 언론에 3.1운동과 한국에 관한 기사가 9000건이나 실렸고, 이승만, 서재필, 정한경등은 하딩 대통령당선자를 만나는등 미국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은 이 워싱턴회의에서 중대한 3가지 국가이익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첫째, 파리강화회의에서 얻어냈던 대륙침략기지 청도(패전 독일의 포기)를 선선히 내놓았다.

    둘째, 레닌 혁명에 간섭하려 파병했던 동시베리아 주둔군 7만5000명을 철수시켰다.

    셋째, 러일전쟁이래 의지했던 ‘영일(英日)동맹’을 두말없이 폐기했다.
    미국은 영일동맹으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행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조선에선 소위 ‘문화정치’로 간판을 바꾸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워싱턴체제 편입을 감수함으로써 ‘3.1운동의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고 하겠다.

    4. 일본 천황, 태평양전쟁의 원인을 거론하다

    패전후 45년만에 1990년대초 공개된 <쇼와천황 독백록(獨白錄)>은 일본을 뒤집어놓았다.

    그 첫머리에서 쇼와는 “제1차대전의 강화조약 내용에서 일본이 주장한 ‘인종평등안’이 열국의 용인을 받지 못하고, 황백(黃白)의 차별감은 의연히 잔존하여, 캘리포니아 주의 이민거부 같은 것으로 일본 국민을 분개시키에 족한 것이었다”고 술회한다.

    이어서 그는 “또한 청도(靑島) 환부를 강제당하게 된 것 역시 그러하다. 이 같은 국민적 분개를 배경으로 하여 한번 군(軍)이 일어섰을 때는 이것을 누르는 것은 용이한 업(業)이 아니다.”라고 썼다.

    독일 조차지였던 청도를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 차지로 되었다가 워싱턴회의에서 중국에 반환된 것에 대한 국민 분개와 이에 바탕한 군국주의 확대는 불가피했다는 점을 변명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쇼와천황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태평양 전쟁의 원인으로 들고 있는 두가지 문제, 즉 인종평등안과 청도귀속문제가 모두 3.1운동 파장의 직격탄을 맞고 무릎꿇어야 했던 일본의 국가적 좌절인 것이다.
    이 두 문제로 증폭된 일본 조야의 반미감정이 '진주만 기습의 도화선’ 그것이었다는 증언인 셈이다.

     1905년 조선과 필리핀을 나눠가진 일본과 미국의 밀월은 14년후 3.1운동이 파경으로 끝냈다.
    '조선 강점'을 일본에 선물한 시어도어 루즈벨트, 40년후 카이로에서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조선 독립'을 선언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식민주의 두 강대국 격돌의 발화점에 3.1운동의 불꽃이 있었고,  
    비인도적 일본의 종말을 재촉한 퓨리탄 아메리카의 가슴에 3.1운동의 글로벌 인도주의가 있었다.
    <全文은 월간조선 3월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