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리더와 모든 시대에는 영욕(榮辱)과 명암(明暗)이 있다.
    이 둘을 함께 보는 것이 바로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누구나 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막상 역사를 이야기 할 때는 자신의 바이어스(bias, 편견)과 선호(選好)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게 인간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가 대표적인 사례다.
    민주화 운동을 한 측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산업화 성과에 대해 아직도 대단히 인색하고 부정적인 점수를 주고 있다. 박정희 아니더라도 그만한 성취는 했을 것이란 주장이다. 그렇다면 민주화 운동 세력이 아니더라도 그만한 민주화는 됐다고 말해도 “그렇다”고 승복할 작정인가?

     반면에, 박정희 대통령을 오로지 존경만 하는 쪽은 ‘박정희 식(式)’이 범했던 ‘지나침’의 측면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모두가 다 “고도성장을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크메르에선 3백 만 명을 죽였다”면서 김재규를 윽박지른, 그래서 급기야 궁정동의 총격사태까지  불러온 ‘박정희 식(式)'의 분신(分身) '차지철 식(式)'도 “고도성장을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긴가?

     한 시대에 대한 반발은 그 역(逆)의 반발을 불러오곤 한다.
    박정희 시대는 그런 이치 덕택(?)으로 최근에 와 그 시대의 ‘암(暗)’의 측면에 대한 기억을 메모리에서 지우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식(式)’이 안고 있던 ‘그 모진 것’의 지나침은 여전히 삭제할 수 없는 역사로 남는다.
    그 살 떨리게 하던 유신(維新)의 칼바람 같은 기질(氣質).... 요즘 와서 왜 그 전율의 기억이 자꾸 뇌리의 모니터상에 다운로드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모질고 독하고 섬뜩했던 그 칼바람 같은 기질(氣質)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