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週刊朝鮮 趙成寬 기자는 朴正熙 대통령 기념관 건립 현장을 답사, 이런 글을 올렸다.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 열병합발전소 앞 택지개발지구. 인적이 드문 외진 이곳에 디지털미디어시티(DMC) 입구와 월드컵경기장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그 왼쪽에 높이 3m도 훨씬 더 되어 보이는 철제 가림막이 모서리 양옆으로 길게 세워져 있다. 한눈에 보아도 무슨 공사현장 같았지만 어디에도 이곳에 대한 안내판은 보이지 않았다. 철제 가림막은 군데군데 녹이 슬고 휘어져 있어 볼썽사납다. 가림막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야트막한 산자락의 빈터. 터파기 공사를 하다 중도에 그만둔 흔적이 어지럽게 내버려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경작 금지’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지만 빈터 이곳저곳에는 옥수수, 고추 등이 자라고 있었다. 마침 60대로 보이는 남자가 고추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여기가 박정희 기념관 부지 맞나요?”

    이 남자가 대답했다.

    “예, 맞는데요.”

    이곳을 처음 와본 사람은 그 장소에 놀랄 것이다. 위치도 후미진 데다 공간도 협소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이 ‘박정희기념관’ 부지라는 사실을 알면 기겁을 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한 공식명칭은 ‘박정희기념·도서관’>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제안으로 시작된 朴正熙 대통령 기념관 건립사업은 10년간 수모를 당하였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은 김대중씨가 大選공약으로 내건 뒤 1999년 정부 지원을 약속해 추진되었다. 총사업비 709억원 가운데 기부금 500억원을 제외한 200억원은 국가 예산으로 지원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사업추진이 부진하거나 기념회가 기부금을 조달하지 못하면 보조금 지원 결정을 전부 또는 일부 취소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고, 이후 4년 동안 기념사업회측의 모금액이 100억원 수준에 그치자 노무현 정권의 행자부는 2005년 3월 보조금 지원결정을 취소했다. 이에 기념사업회는 정부를 상대로 '국고보조금취소처분 취소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7년 서울고법은 행정법원(1심) 판결에 이어 "기념관 건립 사업의 진행 경과가 정치적 상황 변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 기부금 모집이 목표액에 미달했다는 단순히 형식적인 기준으로 보조금 지원 결정을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원고(기념사업회) 승소 판결했다. 

    大選이 끝난 뒤인 지난 해 1월 행자부 관계자는 "박정희 기념관 사업은 정부가 아닌 민간사업인 만큼 취지에 맞게 민간의 자발적 모금을 통해 추진돼야 하며 따라서 정부의 지원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면서 "민간 기부금보다 정부의 지원금이 더 많게 되면 사업 취지에도 어긋난다"고 말하더니 대법원에 상고했다가 올해 패소판결을 받았다. 서울 상암동 월드 컵 경기장 부근 부지에서 기초공사를 하던 중 중단된 상태에서 이제는 공사 再開가 가능해졌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회장 金正濂 전 대통령 비서실장)는 대법원의 확정 판결에 의하여 정부지원금 200억원을 쓸 수 있게 되었으나 이번엔 장소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이들의 異見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이런 주장들이다. 
    “변두리에 초라한 기념관을 짓는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지도자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 도심부에 기념비적 건물을 지어야 한다.”
    “이렇게 굴욕적으로 지을 이유가 없다. 현 기념관 건립 계획을 포기하고, 국민과 국가가 좋은 장소를 제시하면서 지어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자.”
    “적어도 광화문 일대, 용산 일대, 아니면 연고가 있는 어린이 대공원 지역에 지어야 한다.” 
      
    김대중씨는 선거용으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약속했으나 방해하고 나선 것도 김대중 정권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2000년12월과 이듬해 12월에 도합 200억원의 국가예산을 기념사업회에 지불했으나 예산사용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사업추진이 부진하거나 기념사업회가 기부금을 조달하지 못하면 보조금 지원 결정을 전부 또는 일부 취소할 수 있다'는 조건에 근거해서이다. 

     정부측은 기념사업회가 100억원을 모으면 100억원의 사용승인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기념사업회는 100억원을 모금했으나 노무현 정부는 100억원 사용승인의 약속을 지키지 않더니 아예 국고보조금을 취소하는 결정을 했다. 기념관(부지 2805명, 연건평 1591평) 건설을 위한 정지작업을 한 상태에서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아 2002년 6월 이후 6년째 공사가 중단된 상태이다. 
     
    김대중 정부는 백범 金九 기념관을 건립할 때 당초엔 150억원 예산 중 100억원을 국가예산으로 지원해주기로 했으나 모금이 제대로 되지 않자 총180억으로 불어난 예산중 160억원을 지원했다. 박정희 기념관에 대한 구박과 김구 기념관에 대한 優待가 대조적이다. 백범 기념관은 위치도 서울 한복판(효창공원)이고, 규모도 박정희 기념관보다 훨씬 크다. 부지는 두 배(5552평)이고, 연건평은 2292평으로 1.5배이다. 
     
    李明博 대통령은 지난 8월 前例를 무시하고 ‘김대중 國葬’을 결정, 反헌법적 6.15 선언의 책임자를 특별 대우하였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확산되고 장례식에도 국민들이 냉담하게 반응하자 李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들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면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을 지원할 것처럼 말하였으나 그 뒤 실천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울시는 대한민국의 상징공간인 광화문에 450억원을 들여 공원을 조성하면서 조선의 인물인 세종대왕 동상을 또 세우고,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치졸한 놀이터를 만들었다. 이 공간은 건국 대통령과 근대화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져야 할 자리이다. 

    대통령 기념관이 설 자리는 그 대통령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상암동은 한강에 가깝다는 것 말고는 연관성도 상징성도 없다. 가장 중요한 교통편도 좋지 않다. 朴 대통령의 기념관이 서야 할 곳은 生家가 보존되고 있는 구미 이외엔 서울의 한복판이어야 하고 역사적 位相을 고려할 때 규모도 金九 기념관보다는 커야 할 것이다. 경복궁~남대문 軸線의 ‘대한민국 심장부’에 세우는 게 最善이고 次善으로선 이전하는 용산 미군기지 부지나 남산, 또는 광진구 능동에 있는 육영(育英)재단 소유의 어린이 회관 부지를 생각할 수 있다. 育英재단은 陸英修 여사가 설립한 공익재단이고 관할 부지는 수만 평에 달하여 서울 도심지에서 찾기 어려운 綠地 공간이기도 하다. 육영재단은 故박정희 대통령의 유산처럼 간주되어 그 자녀분들이 관리하여 왔다. 이곳에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면 연고성도 있고 예산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며 특히 어린이 회관과 연계하여 운영하면 기념관의 진정한 목적인 後世교육도 효율적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그럴 듯하다. 
     
    박정희 기념사업회 인사들은 박 대통령 시절에 重用된 분들이라 “우리 生前에 기념관 건물을 꼭 지어서 報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불만이 있지만 상암동의 기존부지에 짓고자 한다.  사실은 오늘의 대한민국 자체가 朴 대통령의 기념관이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이승만이, 눈에 보이는 것은 박정희가 만들었다”는 표현을 쓴다. 따라서 서둘러 무리하게 박정희 기념관을 지을 이유는 없다. 기념관은 여러 번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 한 번 제대로 된 역사적 건물을 지어야 한다. 

    워싱턴엔 미국의 4대 대통령이라고 할 만한 워싱턴, 링컨, 제퍼슨,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기념물이 있다. 이 기념물이 도시 공간과 도시 기능의 핵심이다. 이승만, 박정희 기념관은 대한민국의 거대한 國格에 어울리는 근사한 건물이어야 하고 도시기능과 접속되어 生動하는 건물이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기념관의 교육기능을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야 한다는 점이다. 
     
    일단 상암동은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건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리는 사이 인터넷기념관을 제대로 만들어 朴正熙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를 제시하고, 이 偉人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겐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좋겠다. 우선 박정희 시절의 公文書를 디지털화하여 공개하는 것이 급하다. 
     
    보스턴에 세워진 케네디 도서관의 경우 모금으로 조성된 2000만 달러를 들여 지은 것인데 건물 자체가 예술적으로 높게 평가 받는다. 유족들이 당시엔 거의 無名이던 I.M. 페이를 설계자로 선택하였다. 바닷가에 지은 이 건물은 유리벽 홀로 유명한데, 모금에 10여 년이 걸렸고, 건축기간은 2년이었다. 1979년의 준공식엔 카터 당시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케네디 대통령 연구자들은 이 도서관을 애용한다. 40만 장의 사진, 2000km에 달하는 필름, 그리고 1만1000릴의 음성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감을 느끼고 유족들과 기념사업회측에 좋은 장소와 예산을 내어놓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인터넷기념관을 잘 만들어 실질적인 기념사업을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승만, 박정희는 김유신, 태종무열왕, 세종대왕, 이순신과 同級으로 평가될 세기적 위인이다. 국민들이 두 사람의 위대성을 自覺할 때까지 기다리기 싫다면 가장 쉬운 육영재단 부지에 짓는 방법이 있다. 변두리의 초라한 기념관은 이 거대한 인물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 

    그 국민들이 어떤 수준인가 하는 것은 그 국민들이 어떤 인물을 기리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반역자와 위선자를 역사의 건설자보다 더 기리는 나라는 병든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