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리핑 망친 중위에게 “내가 기다릴게 긴장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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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제작된 연무비 ⓒ 자료사진

    함병선 훈련소장의 대통령에 대한 환영인사가 끝났다. 이젠 문의환 중위 차례였다. 생전 처음 대통령을 면전에 모신다는 것만으로도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인데 좌석을 가득 메운 귀빈들을 눈앞에 대하는 순간 ‘헉’하고 숨이 막혀왔다.

    브리핑 원고는 브리핑대에 놓여 있었지만 일반 상황은 영어로 암기하여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부대의 일반상황에 대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문 중위는 간신히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하지만 채 2~3분도 안 되어 숨이 막혀버려 계속할 수가 없었다. 다리는 마구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훈련소장님께 뭐라 말하시더니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Lieutenant(중위)는 브리핑을 잠시 멈추고 내려와서 이곳 어디 빈자리에 앉아요. 그냥 서있으면 긴장이 풀리질 않아. 마음이 안정된 후 다시 계속하면 되지.” 이 대통령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누군가 이 Lieutenant에게 물 한 글라스 가져다 줘. 그리고 중위, 깊게 심호흡을 해. 내가 좀 기다릴 테니까."

    대통령은 이내 그에게 시선을 거두더니 낮은 목소리로 함병선 소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문 중위는 강단에서 내려와 앞줄 좌측 모서리에 의자를 놓고 잠시 앉아 숨을 골랐다. 평소 즐겨 암송하던 Barbara Cagle Ray의 ‘Morning Walk’라는 시가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순간적이지만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문 중위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강단에 올라가 브리핑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그래도 염려스러웠던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나리오가 있으면 읽어도 돼.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하면 마음이 가라앉지”라고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용기가 났다. 원래 준비한 대로 원고를 보지 않고 무사히 설명을 마치자 대통령은 “중위는 경험을 쌓으면 훌륭한 장교가 되겠어.”라고 격려했다. 1954년 10월 30일 논산 육군 제2훈련소 연무비 제막식 날의 풍경이다.

    그로부터 55년의 세월이 지났다. 대통령 앞에서 숨 막혀하던 그 중위는 어느덧 만 82세를 맞았다. 하지만 “그때 대통령께서 인자하고 온화한 음성으로 말씀해주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기억한다. 그 얘기를 하는 그의 눈엔 뽀얀 그리움이 흐른다.

    “이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와 애정 어린 격려가 없었더라면 자신의 무능에 대한 수치심과 좌절감 또 주변 사람들의 힐책을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문의환 씨는 “가끔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모셨던 한국 국민은 운 좋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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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9월 19일 논산훈련소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 자료사진

    문씨는 소령 예편 후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근무했다. 1970년부터는 산하 비상기획위원회 선임 연구관으로 근무하며 국가비상시 모든 가용 자원의 조직화를 담당하는 국가동원 업무를 맡았다.

    그가 1973년 6월부터 3개월간 미 국무성 AID Program에서 주관하는 ‘비상대비 세미나’에 한국정부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을 때의 일이다.
    미국 대통령 직속 국가비상대비청(Office of Emergency Preparedness-OEP)의 해당 부서를 방문해 접견실에서 책임자를 기다리는데 간부인 듯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문 선생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Hi Mr. Moon you are lucky)”

    초면에 운이 좋다니? 문씨가 당황하자 그는 유머러스한 몸짓을 하며 말했다. “느닷없이 말씀드려서 당혹하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말씀드리려든 것은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모시게 된 한국 국민은 운이 매우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지요. 정치-외교계에서의 그의 왕성한 활동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인품에 관하여서도 상세히 기술된 전기적 문헌들을 읽으며 연구할 기회가 있어 이 대통령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이승만은 그릇이 큰데다 엄청난 지도력을 가진 인물로서 조국을 위한 예리한 통찰력과 결단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는 데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제가 봉직하던 한 연구기관에서 가까이 지내던 동료나 관계자들도 저와 뜻을 같이 하더군요….”

    논산에서의 이 대통령에 대한 기억이 겹쳐지면서 문 씨는 우리가 정말 훌륭한 대통령을 모셨다는 자부심과, 그런 그를 우리가 내쳤다는 자괴심이 함께 밀려 왔다. 문 씨는 지금도 그 사람의 얘기를 영문으로 기억하고 있다. “Sorry for my abruptness Mr. Moon, please excuse me if I've embarrassed you.  What I meant to say was that the people of Korea are very lucky to have had Syngman Rhee as the first president. I had an opportunity to read and study some of his biographical information, detailing his personality as well as his vigorous activities in diplomatic and political society. Well in short, personally, I'm very impressed that he is a man of high caliber and stupendous leadership, one with great insights and determination for his country. Some of my close associates and colleagues in a certain institute whom I have worked with some years back have attested to this…)
    문 씨에게 말을 걸었던 미국 신사는 OEP 고위 직원으로 정치고문을 맡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6.25 전쟁 중 통역 장교로 참전했던 문 씨는 이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선 무엇이든 하는 강한 지도자였다고 기억한다. “6.25 사변을 당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그 위치에 있었다면 과연 미국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의 참전이 성사될 수 있었을까요?” 문 씨는 결코 아니라고 고재를 내젓는다.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국 장교들로부터 수없이 불평을 들었습니다.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던 작은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미군 동료 장교들은 볼멘 소리를 했습니다. “염병할 것 같으니! 이놈의 저주스런 일이 모두  바보 해리(투루먼)가 고집쟁이 늙은이에게 놀아났기 때문이란 말이야.(Damn it! All this evil is because a folly Harry lost to a stubborn Geezer!)”

    보수단체 집회마다 얼굴을 내미는 ‘82세 아스팔트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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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환씨 ⓒ 조갑제닷컴 제공 

    문 씨는 7남매의 막내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때 월남해 경희대의 前身(전신)인 신흥대학에 다니다 6·25를 만난다. 학도병 모집 공고를 보고 국군에 자원입대해 육군본부 행정요원으로 근무하던 중 1951년 가을 통역장교 시험을 보고 합격해 통역장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보병으로 전과해 1967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1986년 대한방직협회 상무를 끝으로 공-사직 생활을 마감한 그는 보수단체 집회마다 얼굴을 내미는 ‘82세의 아스팔트 전사’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월례 역사강좌나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의 현대사 강의 역시 빼놓지 않는다. 한미우호협회 회원으로 월 1회 저녁식사 모임, 경제인· 대학교수들이 주로 모이는 한강포럼 회원으로 월 1회 조찬모임, 광화문포럼 회원으로 월 1회 조찬모임에도 회원으로 참석한다. 각종 모임의 회비만도 1년에 100만원은 나간다. 그는 “작고 큰 애국 모임에 나가 머리 수 채워주고 고함지르고 태극기 흔들고 피켓 들어주는 것이 애국적인 일을 기획한 이들을 돕는 길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국 방법”이라고 말한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고함지르는 그에게 친구들이 핀잔을 하지만 “야 이 사람아, 당신처럼 방구석에 앉아 애국하는 게 더 창피한 일이야!”라고 받아친단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재조명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한 것 같아 기쁩니다. 동상도 기념관도 하루빨리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그의 가슴속에서 대통령은 아직도 살아 말하고 있었다. “Lieutenant(중위)은 브리핑을 잠시 멈추고 내려와서 이곳 어디 빈자리에 앉아요. 그냥 서있으면 긴장이 풀리질 않아. 마음이 안정된 후 다시 계속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