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송옥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 ⓒ 뉴데일리
    ▲ 최송옥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 ⓒ 뉴데일리

    해방 전엔 경기도 연천에 살았다. ‘부자’ 소리 듣고 살던 집. 사랑방엔 손님들은 끝없이 드나들었다. 본인이 “이만 가보겠습니다”라는 말이 없으면 몇날 며칠 머물러도 반기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들이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돕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단 두 가지를 가르쳤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독립정신이었다.
    그런 교육을 받은 딸은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조회 때마다 치러지는 황국신민선서 낭독시간에 선서 대신 “하나님, 빨리 일본이 패배해서 우리 조선이 독립하게 해주세요”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흐른 1996년. 이 해 8월 15일자 조선일보 ‘사람들’ 면에 모두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기사가 하나 실렸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도와 교회활동과 독립운동을 해 온 고 최기식 선생의 자녀들이 종로구 부암동 198번지 일대 약 3000여 평방미터의 집과 대지를 연세대에 기증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증자는 “이승만 대통령을 연구하는 용도로 써 달라”는 당부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8월 16일 당시 시가 60억 원 상당의 집과 대지는 공식적으로 연세대에 전달됐다.
    그리고 1년 뒤 그 집은 연세대 부설 현대한국학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문을 세상에 새롭게 선보였다. 이화장이 그동안 보관해온 10만장이 넘는 이승만 대통령 사료 전체를 연구소에 양도했고, 삼성그룹이 기금 50억원을 출연해서 이뤄진 결실이었다.

  • ▲ 최송옥 이사의 사재 출연을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 ⓒ조선일보 지면 캡쳐
    ▲ 최송옥 이사의 사재 출연을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 ⓒ조선일보 지면 캡쳐

    연구소의 산파역을 한, 시가 200억원 상당의 사재를 쾌척한 최송옥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는 여든을 앞뒀다. 하지만 자택인 광장동의 한 아파트에서 마주한 그는 건강미 넘치는 앳된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님께 이승만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요. 또 제가 평생을 존경한 분이고요. 이 박사의 애국애족을 생각한다면 그 재산을 내놓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일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콩나물 한 줌이라도 더 챙기고 싶은 것이 주부의 마음인데. 되물으니 “정말”이라고 했다.
    “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도 며칠 전에 돈 1만원을 잃어버렸는데 어찌나 아깝던지... 하지만 이승만 박사는 달라요. 평생을 우리 민족만을 생각해온 분인데 되레 제 보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지요.”
    최 이사는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 박사는 우리 민족에겐 하나님과도 비견할 수 있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테이블이 특이했다. 투명한 유리장 모습이었는데 유리 속엔 이승만 대통령의 사료들이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승만 박사나 프란체스카 여사나 당시로선 드물게 기록의 중요성을 아신 분이었어요. 국적도 없이 떠돌아 다니면서도 모든 자료를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유리장 속엔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이며 하버드대 수학시절의 구내식당 식권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서명운동 서류가 놓여 있었다.
    “손님들이 오시면 서명해달라고 부탁을 해요.”

    요즘은 이승만 박사에 대한 재조명 운동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지만 최 이사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어떤 시각도 냉대 받던 시절부터 외롭게 이 대통령 바로 알리기에 나선 사람이다.
    “평범한 주부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도 나름대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박사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커다란 힘이 됐습니다.”
    지난 1998년 묘비도 없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작동 현충원 묘역에 비석을 세운 것도 최 이사와 그 동지들의 힘이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에 ‘건국대통령 이승만’이란 비석을 만들었는데 정부 반대로 그 표현을 못 쓴 겁니다. 당시 정부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으로 하라고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초대 대통령으로 새로 비석을 만들어 세우고 건국대통령이라고 쓴 것은 이 박사 묘역 앞에 묻어야 했습니다.”
    최 이사는 “이승만 박사의 건국을 부정하는, 손으로 해를 가리려는 정부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안타까움은 이것만이 아니다. 자신이 기증한 곳에 세워진 현대한국학연구소라는 이름 역시 가슴을 찔러온다. 이승만 박사와 관련한 방대한 사료가 있고 “이승만 대통령을 연구하는 용도로 써 달라”는 당부까지 했지만 ‘이승만 기념관’이나 ‘우남 이승만 연구소’로 명명되지 않은 것도 마음 아프다.
    몸담고 있는 기념사업회가 제 구실을 못하고 지지부진한 것도 마음이 걸리는 부분이다. 애국운동 단체라면 가리지 않고 콩 한쪽이라도 나누는 마음으로 돕고 있지만 여전히 나라는 중심축을 잃고 흔들린다.
    “대한민국이 굳건한 반석에 서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것을 모든 국민들이 제대로 아는 날이 제가 꿈꾸는 날입니다.”
    최 이사는 시인이다. 지난 2006년 ‘하늘 끝에 살아도’라는 개인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시인은 열정의 사람들이다. 그 열정이 이렇게 여든 가까운 나이를 아름답게 느끼게 해주는 것일까? 

    나 한 그루
    벚나무이고 싶어

    긴 경루
    속 깊은 사랑을 키웠다가
    밀려오는 그리움에 허기지던 어느 봄날
    억만 송이 불꽃으로
    찬란하게 터지고 싶어
    .

    최송옥 시 ‘벚꽃’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