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간 몽골 여자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 결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주 적은 시간이면 족했다.

    우선은 아무런 연고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몽골 여자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어디 가서 이런 여자를 아느냐고 문의해 볼 만한 데가 도무지 없다는 것이었다. 관공서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규의 아내임을 입증하는 혼인신고 기록을 빼면, 그 몽골 여자에 대한 주민등록은 물론 과거에 대한 일체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가 없는 여자였다는 거였다.

    어찌보면 성규의 아내인 그 몽골 여자는 없는 여자, 존재하지 않는 여자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그렇다는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추적하고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추적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일단은 존재한다는 조건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성규의 도망간 아내인 몽골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그와같다면, 성규의 도망간 아내를 찾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간 우리 셋은 그 도망간 몽골 여자, 성규의 아내를 찾아나섰다. 그 일이 불가능한 일이든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든, 그렇게 했다.

    우리 셋이란 나와 성규와 지만이를 일컫는 것이었다. 원래 성규의 도망간 아내를 찾는 일은 나와 성규 둘이서 하기로 되어 있는 일이었지만, 얼마 안 가 지만이가 이 일에 동참했다. 지만이가 이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은 요즈음 딱히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던가 싶다. 아니면, 사람 찾는 일에 특별한 호기심과 관심이 있어서였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내를 잃고 상심에 빠진 친구 성규를 위해 자그마한 미력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다소 감동적인 사연에서였든가.

    지만이란 사람은 성규의 고등학교적 동창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을 들어왔고, 대학 졸업 후 성규와는 달리 서울에 뿌리를 내렸던 것 같았다. 무슨 컴퓨터 관련 IT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사업이 그다지 호황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지만이란 사람의 진짜 직업은, 컴퓨터 관련 사업은 부업이고, 도를 닦는 거였다. 그가 직접 한 얘기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지만이는 자신이 우학도인의 적통 제자라고 했다. 우학도인의 계를 이어받은 제자가 자락도사인데, 자락도사의 제자가 자기라는 것이었다. 우학도인이라면, '단'이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단'이란 소설의 주인공이 우학도인이었으니까 말이다. 좀 의아한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인 우학도인이 실제 인물이었던가 하는 점이었는데, 지만이는 우학도인이 실제인물이고 소설 '단'이 그 실제인물 우학도인을 배경으로 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학도인이 실제인물이라면 우학도인은 상당한 도를 터득한 인물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책에서 보면 우학도인은 축지법까지 쓸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던 거니까.

    우학도인이 실제인물이든 아니든 지만이 특이한 사람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성규의 도망간 아내 몽골 여자를 찾는 일에 흔쾌히 동참한 것도 그 특이함이 작용한 탓일 터임에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사업까지 내팽개쳐두고 친구의 아내를 찾겠다 나설 리 없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럴 사람은 결코 없을 일이었다.

    나는 이번 일로 지만이를 처음 보고, 알게 되었다. 지만이 이번 일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좀 낯을 가리는 스타일이었고, 일이 좀 번잡스럽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지만이의 동참은 결과적으로 내게 유쾌한 일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하고 짜증스러운 이 일에 윤활유를 제공해주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만이의 본업이 도를 닦는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 도를 닦는 거라면 나와도 결코 무관치 않다는 생각 탓이었다. 젊어 몇 년간 세속을 떠나 중 생활을 좀 했던 나로서는 도 닦는 게 업이라는 소리가 예사롭게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중생활이란 것도 따지고보면 도 닦는 거나 진배없는 것이었으니까. 제대로 된 중이라면 그렇다는 거다.

    물론 지만이 닦고 있는 도와 내가 몇 년간의 중생활을 통해 익힌 어줍잖은 도와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우학도인의 도와 중의 도가 같을 수는 없는 거겠지만, 이건 달라도 참 너무 많이 다른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나는 도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도란 성립불가능하고, 성립 가능하다 하더라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만이는 달랐다. 도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거고, 그래서 도를 닦는 거라고 했다. 모두를 위한 도란 허구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중생활을 좀 했다는 얘기를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불교에 빗대서 자기 도를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학도인의 도 말이다.

    지만은 우리나라의 대승불교보다는 동남아의 소승불교에 더 마음이 끌린다고 했다. 대승불교는 깨달음에 이른 후 그 깨달음을 대중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대중들 앞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외침소리를 내는데, 이 'follow me'가 자기기만이요 자만이라는 것이다. 자기기만이나 자만은 깨달음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데, 이런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니 그 깨달음은 가짜요, 가짜가 아니더라도 그처럼 변질될 가능성이 높은 깨달음이요 도라고 했다.

    반면에 소승불교에서는 깨달음 자체가 목적이고, '나를 따르라'라는 어줍잖은 짓은 하지 않으니, 소승불교에서의 깨달음 즉 도가 진짜 깨달음이요 진짜 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지만이의 말에 일리는 있었다. 대중 앞에 서서 내가 도인이니 '팔로우 미' 하는 데에는 자기기만 뿐만아니라 대중기만, 상징조작 등의 사기성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역사상 그로인해 야기된 부작용이 비일비재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만이의 말에 일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근본적인 오해가 있었다.

    대승불교는, 깨우친 각자가 있고 난 연후에, 그 깨우친 각자가 대중들을 향하여 'follow me' 하는 그런 게 아니다. 대승불교의 요체는 자기만의 깨달음은 없다는 거고, 모두가 깨닫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의 깨달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각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타인'의 깨달음이 우선하든가, 동시적으로 가능하든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대승불교는 대중지향적이 될 수 밖에는 없다. 타인이 깨닫지 못하는 한, 자신에게도 깨달음이 없는 까닭이다.

    지만이의 대승불교 이해는 오히려 소승불교에 가까운 것이었다. 타인과 무관한 자신만의 깨달음이 우선할 수 있다는 입장이 소승불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승불교가 자신만을 위한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것은, 내 상식으로는 맞지 않는다. 소승불교 역시 대중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각자는 반드시 대중을 향해 나아가도록끔 되어 있는 게 소승불교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지만이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긴 하였지만, 동의하지는 않았다. 나의 대승 소승 불교 이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았다.

    지만은 도란 대중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대중 지향적일 수 밖에 없다는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고, 수긍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도란, 깨달음이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고, 자기 자신만으로 완성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타인 즉 대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연관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철두철미 그와같이 믿고, 수정하지 않았다.

    나는 오래 지만이와 논쟁하지는 않았다. 실제 도를 닦는 사람과 아주 먼 발치서 도를 닦는 사람을 흘끗 거릴 뿐인 사람이 오래 논쟁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지만이 답답하단 느낌은 있었으나, 내 느낌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실제 도를 닦고 있는 사람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수 밖에는 없는 일이었다. 내 논이 맞다 하더라도 실제 도를 깨우치는 건 도를 닦고 있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도란 타인이나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만 관계된 그 무엇일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만이의 접근이 맞는 게 아닌가.

    누구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입에서였을 수도 있었고, 지만이의 입에서였을 수도 있었고, 성규의 입에서였을 수도 있었다. 그 말이 입 밖에 나왔을 때, 우리 중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우리가 그 말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쩜 우리 중에 그 말을 꺼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도 몰랐다. 문득 우리 세사람의 머릿 속에 동시에 영감처럼 떠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딱히 누가 그 말을 꺼냈다는 기억이 나의 머릿속에 없고, 세사람의 머릿 속에 동시에 똑같은 영감이 떠올라온다는 게 다소 무리처럼 생각되긴 하지만, 워낙에 궁했다.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었다.

    성규의 도망간 아내를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을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짚이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는데,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진배없는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게 나와 성규와 지만이의 머릿 속에 동시에 영감처럼 떠올라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용한 점집으로 가 그녀의 행방을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용한 점집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점집으로 유명한 곳이 미아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미아리로 갔다. 한동안 어느 점집이 용한 점집일까를 궁리하며 점집들 앞을 지나다, 문득 지만이가 그랬다. 여기야. 여기. 지만이가 여기야 여기 라고 한 점집은 처녀보살이라는 간판을 단 점집이었고, 우리는 군말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처녀보살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기는 했지만, 점쟁이는 보살일지는 몰라도 처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노파에 가까운 중늙은이였다. 나는 속은 기분이었고, 점집을 잘못 찾아들어온 게 아닌가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나가 다른 곳으로 가자는 말을 하기에는 늦어 있었다.

    점집을 잘못 찾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꽤 있긴 하였지만, 그러나 점을 보고 처녀보살집을 나오는 기분에는 불만이 없었다. 점을 잘 보았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중늙은이 처녀보살이 괜찮은 점쟁이였다는 것이었다.

    그 중늙은이 처녀보살은 우리의 기대를,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상당 정도 만족시켰다. 그곳을 나오는 나와 성규와 지만이에게는 막연하나마, 성규의 몽골 아내가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떠올라오고 있었다.

    처녀보살은 이와같이 예측했다.

    성규의 몽골 아내는 원래 북쪽 추운 지대를 다스리는 귀신의 여자이다. 북쪽 추운 지대를 다스리는 귀신의 세력이 약화되어 성규가 아내로 데려올 수 있었지만, 북쪽 추운 지대를 다스리는 귀신의 화를 사고 만 일이다. 북쪽 추운 지대를 다스리는 그 귀신이 자기 여자를 찾으러 이곳으로 왔고, 그래서 성규의 몽골 아내가 집을 나가게 된 거라는 것이었다.

    북쪽 추운 지대의 귀신에게 이끌려 집을 나갔으므로 당연히 성규의 몽골 아내는 북쪽으로 갔다고 했다. 그러나 성규의 몽골 아내는 북쪽 추운 지대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필사적으로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규의 몽골 아내가 지금 있는 위치는 정확히, 북남동쪽의 어디쯤이라고 했다. 처녀보살이 막연히 북남동쪽 어디라고 하면서 지역을 똑 집어서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북남동쪽이라면 대강 짚히는 구석이 있었다. 지만이나 성규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처녀보살이 북쪽 추운 지대의 귀신을 퇴치하기 위해 부적을 사라고 했다. 성규의 몽골 아내를 되찾자면 북쪽 추운 지대의 귀신을 몰아내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신이 파는 이 영험한 부적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녀보살이 노란 바탕에 붉은 색 그림인지 문양인지 박인 부적을 꺼내놓았다. 그게 북쪽 추운 지대의 귀신을 퇴치하는 부적이라는 것이었다. 상당히 비싼 값이었지만 성규가 군말없이 그 부적을 샀다. 내가 성규였더라도, 상당히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군말없이 그 부적을 샀을 것이었다.

    그 처녀보살이 성규의 몽골 아내가 지금 북남동쪽에 가 있다고 하였을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올라 온 곳이 남양주였다. 남양주에 있는 몽골문화촌이었다. 그곳에 가 본 적은 없지만, 남양주에 몽골문화촌이 있고, 그 곳에 가면 꽤 많은 몽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북쪽이라 하였으니 성규의 시골집이 있는 청양보다는 북쪽에 위치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또 남쪽이라 하였으니 완전히 북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되었다. 또 동쪽이라 하였으니 북과 남 사이에서 동쪽으로 어느 만큼 이동해 있어야만 했다.

    북쪽과 남쪽과 동쪽 모두를 고려할 때 처녀보살이 말한 북남동쪽은, 남양주가 가장 그럴 듯 했다. 성규의 집이 있는 청양보다는 북쪽에 있었고 또 양주보다는 남쪽에 치우쳐 남양주라 불리니 남쪽의 의미가 있고, 서울에서 볼 때 동쪽으로 치우쳐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양주란 도시가 몽골과 무관하지 않은 도시라는 것이었다. 남양주는 몽골과 무슨 결연 비슷한 것을 맺고 있는 듯 하고, 그곳에 가면 몽골문화촌이라고 하는 몽골과 관련된 장소가 있다는 것이었다.

    지만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남양주의 몽골문화촌 얘기를 꺼내자, 대뜸 나의 얘기에 맞짱구를 쳐왔다. 자신도 성규의 몽골 아내가 지금 북남동쪽에 가 있다는 점쟁이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몽골문화촌을 떠올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규는 그렇지 않았다. 성규는 시골에서 살아 서울과 서울을 둘러싼 도시들의 지리에 어두웠고, 몽골문화촌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