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한기 6.25남침피해유족회 회장. ⓒ 뉴데일리
    ▲ 백한기 6.25남침피해유족회 회장. ⓒ 뉴데일리

    “빨리 오쇼. 나 또 서초동 가야 하니까.”
    숨 넘어 가는 재촉 소리에 놀라 달리다시피 약속장소로 갔다.
    “서초동엔 왜 가시는데요?”
    “아, 검사 만나서 수사 빨리 해달라고 부탁해야 해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백한기 6.25남침피해유족회 회장. 그는 전형적인 아스팔트 우파이다. 자신의 신념에 맞는 곳이면 낮밤을 가리지 않는다.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듯한 무더운 거리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다.

    6.25가 나던 해 그는 고향인 전북 고창의 평범한 어린 중학생이었다.
    그런 그를 인민군이며 ‘토착 빨갱이’들이 유격대장으로 만들었다. 전쟁 전 좌익 학생들을 탄압했다는 이유였다.
    “고창경찰서 마당으로 끌고 가더니  수갑을 채우고 몸을 끈으로 묶은 뒤 여러 명이 그냥 몽둥이로 두들겨 패더군요. 기절을 하면 물을 붓고는 또 때리고, 기절하면 물을 가져다 붓고…. 왼쪽 팔이 부러졌습니다. 그래도 죽지 않으니까, 단도로 머리 중앙을 내리 찍었어요.”
    이 말을 할 때 그는 분에 겨워 한참을 말을 못 이었다. 여든에 흘리는 눈물은 한의 깊이를 웅변한다.
    당시 전주北중학교 교사였던 형(백영기·전 한양대 교무처장)의 도움으로 탈출한 백 회장은 서울 수복 후인 1950년 10월2일 전주 전북도청 광장으로 가서 학도병을 지원했다. 그리고 고창 수복을 위한 고창경찰서 부대에 배속됐다.

    백 회장은 학도의용대원들을 대상으로 전투 참가 희망자를 11명 모집해 ‘서부지구 해안 백골 유격대’를 만들었다. 백 회장이 대장을 맡았다.
    이들 백골유격대의 활동은 백선엽 장군의 책 ‘실록 지리산’에도 소개돼 있다. 백 장군은 책에서  “17명의 중학생으로 구성된 ‘백골유격대’가 고창 빨치산 토벌의 선봉에 섰고, 빨치산도 소년 유격대를 두려워했다”고 증언했다.

    “인민군과 빨치산들은 부녀자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조건 다 죽였습니다. 고창은 ‘인간 도살장’이었죠. 인민군과 좌익의 패륜적 만행을 두 눈으로 지켜봤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이 총을 들고 유격대로 나섰던 겁니다.”
    백 회장은 “6·25때 공산당에게 희생당한 고창지역 주민의 수가 4000명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고창에서의 인민군들에 의한 학살을 국군 11사단이 빨치산 토벌 도중 주민과 피란민을 사살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제가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본 것을 왜곡한 것이죠.”
    백 회장은 이 과거사위 결정을 뒤집기 위해 1년 넘는 세월을 두 발로 뛰었다. 청와대로 국회로 진정서를 내고 과거사위와 논쟁도 수없이 했다.
    결국 과거사위는 이른바 ‘고창 11사단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재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백 회장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 현장조사를 맡았던 과거사위 직원 등을 고발한 상태. 그러나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직접 달려가겠다는 것이다.
    “6.25 사진전도 보면 가짜가 많아요. 인민군들에게 죽은 것을 국군이 사살했다고 조작해놓고. 그래서 항의했더니 ‘고창 것은 뺐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백 회장은 “싸울 상대가 너무 많아 아플 시간도 없다”고 했다.
    이런 사람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지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