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부터 성규는 기분이 영 꽝이었다.

    기분이 영 꽝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오늘 하루 별로 되는 일이 없었다. 성규는 결코 기분파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고 나쁨에 따라 하루 일진이 영향을 받는 건 어쩌는 수 없는 일 같았다.

    우선 새벽부터 억수같이 비가 왔다. 장마라고는 하지만, 일주일 내내 말끔하다 주말이 되어서야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건 하늘이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엿을 먹이려는 장난짓만 같았다.

    주말에 비가 오면 장사는 날샜다. 장사 공친다는 것이었다. 이건 주말장산데 주말에 장사를 못한다면, 먹고 살기 막막해진다는 얘기였다.

    바야흐로 때는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고, 도시 사람들의 엉덩이가 들썩일 때였다. 주말이면 성규의 펜션 일대가 나들이 나온 사람들과 차량들로 그득했다. 방이 모자라 사람들을 못받지, 사람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헌데, 비가 오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대목 계절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번 주말엔 펜션 두개가 예약되어 있었는데, 오전 일찌감치 연락이 왔었다. 그것도 십분 상관으로. 무슨 짜고치는 고스톱에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예약을 취소한다는 전화였다. 억수같은 비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억수같은 비에 주말을 즐기러 여기까지 올 사람들은 없었다. 불륜에 몸이 단 연인들이 아니라면. 성규 자신도 그럴 터였다.

    그래서 성규는 토를 달지 않았다. 예약취소를 기대된, 당연한 것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예약취소는 안된다는 한마디쯤 엇나갈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이런 억수같은 비에 그런 엇비침은 온당치 않았다.

    예약된 펜션마저 취소하는 마당에 우연히 찾아드는 손님들이야 더욱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지만, 역시나였다. 아무도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겨울의 눈내린 비수기 때처럼, 고요하고 적막했다. 보이는 거라곤 늘 풍경화처럼 걸터앉아있는 푸프른 앞 산과 개울과 비 뿐이었다.

    일요일인 내일도 비가 올 거라고 했다. 다음주 수요일까지는 전국이 장마전선에 들어 이렇게 억수같이 비가 올 거라고, 뉴스에서 그랬다. TV뉴스는 지랄 맞았다. 평일날, 그러니까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날 비가 오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억수같이 오든 가랑비처럼 오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내일, 일요일에도 억수같이 비가 온다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았다. 일요일에 비가 억수같이 온다면, 내일도 오늘 같다는 얘긴데, 내일도 오늘 같다면 장사는 공친다는 것이었다.

    밤에 성규는 지랄같은 KBS TV뉴스를 다 보고나서, 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거칠게 눌러 TV를 끄고는, 생각했다.

    이게 다 그 안 좋은 소식 때문이라고. 새벽부터 억수같이 비가 오고, 예약된 손님이 예약 취소를 하고, 하루종일 손님이 코빼기도 들지 않고, 내일도 이런 일이 반복될 게 뻔히 예상되는 이게 모두, 그 안 좋은 소식 때문이라고.

    사실 그 안 좋은 소식은 성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전혀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거지반 상관없는 일이었다. 전혀 혹은 거지반 상관이 없는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나빠지고, 그 나쁜 기분의 영향 탓에 하루 일진을 망쳤다고 하는 것은 좀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 있는 일이겠다. 그러나 성규는 어김없이 그와같이 느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상 때문이었다.

     그 안좋은 소식이란, 중국을 거쳐 베트남까지 장장 일만여킬로미터에 이르는 먼 길을 탈북해 온 네 명의 탈북자들이 덴마크 대사관에 진입해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네 명의 탈북자들은 부부와 그 부부의 자식인 두 어린애들이었다. 이들이 덴마크 대사관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덴마크 대사관에서는 이들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어느 나라의 공안들처럼 이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게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쳤다면 성규도 잘 된 일이네, 하면서 그만 말았을 것이었다. 기분을 잡치지도 않았고, 과거의 회상에 연루되지도 않았을 거라는 것이었다.

    헌데, 곁에 있던 어머니가 불쑥 이런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어머니야 무심코 던진 말이겠지만, 그게 성규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었다.

    "왜 한국대사관으로 가지 않고 덴마크 대사관으로 갔지 어차피 한국대사관으로 인도되게 될 텐데."

    어머니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한국대사관에 인도되게 될 거라면, 덴마크 대사관에 진입하는 우회적 길을 가는 것보다, 단도직입적으로 한국대사관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게 수고를 덜 일이었다. 게다가 탈북자 문제는, 이는 좀 의심스러운 바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한국대사관의 문제였지 덴마크 대사관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덴마크 대사관은 제 삼자지 당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어머니는 태국이나 동남아까지 와 본 적도 없고 중국에서 몇 년씩 고생한 바도 없이 수월하게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 경우여서, 태국이나 동남아로 넘어가는 탈북자들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잘 몰랐다. 아니, 전혀 몰랐다. 어머니가 수월하게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한국에 들어와 정착한 성규가 돈과 사람을 보내어 어머니를 탈출시켜 데려온 덕분이었다. 성규는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그렇게 북한에서 태국으로 데려왔던 것이었다. 그게 재작년 가을이었다.

    어머니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몇 해를 떠돌며 고생하다 자유를 찾아 태국이나 베트남 등지의 동남아로 넘어온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동남아의 한국대사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왜 탈북자들이 한국대사관에 진입하지 않고 미국이나 일본 덴마크 등과 같은 서방측 국가의 대사관에 진입하게 되는지.

    "한국 대사관을 찾아갔겠지 안 갔겠어요. 그만 바라고 온 사람들일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덴마크 대사관에 진입했다 하느만."

    성규는 더 말을 할 듯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머니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북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먹고 잘사는, 자유로운 한국에 와서 무척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성규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줄 만한 얘기를 하는 건, 그건 성규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일을 떠올리면 성규는 울끈불끈 분노가 치밀고, 화가 일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이라는 데가, 아니, 대한민국 대사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고 욕이 올랐다. 성규는 기분이 나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때 느꼈던 그 분노의 끝자락이 그 기억만 떠오르면 되살아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규는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경우에는 애써 외면하거나 스스로의 기억을 억압했다. 가끔 어머니나 두 여동생에게 과거 자신이 탈북해 고생하던 얘기를 들려주지만, 늘상 한국대사관과 관련된 그 부분만큼은 의도적으로 빼먹거나 삭제했다.

    성규는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은 갖고 싶어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그에게 새 삶을 허락해주었고, 그 새 삶은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런 대로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성규는 서울 근교의 현리에 펜션을 겸한 꽤 큰 음식점을 낼 수 있었고, 장사는 크게는 아니라 하더라도 먹고 살 만큼은 유지되고 있었다. 게다가 성규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 두 누이동생마저 한국으로 데려올 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고, 남동생을 데리고오지 못한 게 유일한 흠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흠이 개선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동생은 군대를 제대하고 성규처럼 일찌감치 중국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아직 그 거처가 파악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조만간에 남동생의 생사여부나 거처를 알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를 성규는 지니고 있었다.

    이러므로 성규는 대한민국과 관련된 부정적인 경험이나 추억을 애써 지우려고 했었다. 헌데, 피치 못할 때가 생기곤 했다. 지금과 같은 때가 그런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