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노재현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가 쓴 <대일 ‘조건반사’ 이제는 그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인기 미드(미국드라마)였던 ‘24’에서는 데이비드 팔마라는 정치가가 최초로 흑인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앞길은 험난해서 참모와 각료들의 배신으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날 뻔하고, 끝내 암살로 최후를 맞는다. 그렇게 드라마·영화에나 등장하던 흑인 대통령이 현실 세계에서 탄생하는 것을 보니 역시 정치는 생물이고, 고정관념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나 보다.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 전 일본자위대 항공막료장의 논문 소동을 지켜보면서 애처로울 정도로 집요한 일본 극우파의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치르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인류평등의 세계가 오는 것은 100년, 200년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같은 내용으로 보아 논문이라 부르기조차 힘든 조잡의 극치다.

    그러나 이런 조잡한 고정관념이 소신이나 신념으로 포장돼 현실 세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문제다. 일본 여론이 논문 내용에 대한 반박을 넘어 이런 ‘꼴통’을 첨단 무기로 무장한 5만 병력의 총책임자로 앉힌 인사시스템과 문민 통제의 위기를 거론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으로, 우리 사회에는 일본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는지, 있다면 근거 있는 신념인지 아니면 스테레오타입화한 조건반사의 산물인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식민지 피지배의 아픈 기억이 60년 넘도록 과도하게 대표성을 띠는 현상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계·언론계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식민지 문제가 일종의 강박(强迫)으로 작용해 현실을 냉정하게 읽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어 보자. 일제 치하를 종전처럼 수탈-저항의 도식으로만 설명하지 말고, 침략-개발의 두 측면을 함께 살펴보자는 게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최소한 기존 주류 학설의 약점·허점을 보완하는 기능만큼은 학계에서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이들이 대뜸 ‘식민지 근대화론=친일’이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자 씌우기’ 수법이다. 친일-반일 구도가 오랜 세월 전가의 보도, 만병통치약처럼 통용돼 온 결과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유연한 문화계에서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기색이 보인다. ‘놈놈놈’ ‘원스 어폰 어 타임’ ‘모던 보이’ ‘경성스캔들’ 같은 영화와 드라마가 증거다. 일제 치하에 수탈당하는 조선인과 만주벌판의 독립군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데 눈을 돌린 것이다.

    일본의 진보·좌파 지식인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이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일본 진보파는 선(善)이고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들은 식민지 지배나 교과서 파동 등에서 한국과 입장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도 그들이 반갑고 고맙다. 하지만 그들도 과거에 지속적으로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

    진보적 잡지 『세카이(世界)』를 중심으로 한국은 악, 북한은 선이라는 터무니없는 고정관념을 휘둘러댔던 것이다. 아무리 박정희가 독재를 했다지만 북한의 학정에 비할 바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와세다대의 니시카와 준(西川潤)은 1971년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세카이』에 ‘북조선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은 인류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기적’이라고 썼다. 북송 재일교포에 대해 ‘일본에서 실업 상태에 있던 귀국자들은 정말로 극락정토에 안착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방북기도 『세카이』에 실렸다. 김일성을 마치 신이나 되는 듯이 떠받들면서 박정희는 광인(狂人)이나 짐승처럼 취급했다.(한상일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

    너무 가까워서일까.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보는 눈에는 아직도 백태(白苔)가 많이 끼어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벗겨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다모가미 전 막료장의 망발은 백태가 아니라 아예 눈이 먼 경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