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노재현 문화스포츠에디터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30일 서울교육감 선거 공정하게 한 표 행사합시다.” “30일 경복궁에서 만납시다.” 

    몇몇 지인이 최근 서울시 교육감 선거 투표일을 앞두고 받았다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다.공정하게 투표하자는 앞의 문구는 기호 1번 '공정'택 후보를 찍으라는 권유이고, 뒤의 것은 6번 주'경복' 후보를 교육감으로 밀자는 뜻이다. 교육감 선거에 이해가 걸린 교사나 교육 관료들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준수하는 시늉을 하면서 특정 후보 선거운동을 벌이자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꼼수까지 동원됐다. 전교조 소속 교사인 한 친구도 아는 이 20여 명에게 ‘경복궁’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저께 밤 공정택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그는 “허탈하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에 사는 그는 투표소에 갔다가 패배의 조짐을 느꼈다고 했다. “아주머니들이 투표하러 엄청 많이 나왔더라”는 것이다.

    “딱 두 가지 이유에서 공정택을 반대했다. 사교육과 부패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주경복 후보의 공약대로 평가시험을 폐지해 학생들의 정확한 실력을 ‘깜깜이’로 만들고 교원평가제에서 뼈 빼고 따귀 빼면, 거꾸로 사교육 받을 돈이 없는 학생들이더 큰 피해를 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패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이었다. 국가청렴위원회의 청렴도 측정에서 서울시 교육청은 지난해까지 내리 3년간 꼴찌를 했다. 그 기관장이 바로 공정택 교육감이었다. 그는 당선 인터뷰에서“투명성과 청렴성을 전국 최고 수준으로 높이겠다”고 다짐했지만, 글쎄다. 3년이나 개꼬리로 판정받은 물건이 불과 1년10개월 내에 황모(黃毛)로 돌변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나에게 공정택씨의 교육감 당선은 ‘찜찜한 안도’다. 마음 한구석에서 주 후보의 낙선이 서운한 것이다.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주후보가 점점 기세를 올리자 그의 전교조식 공약에 대한 우려를 뚫고 딱 한 가지 기대가 솟아났다. “서울교육청을 한번 홀라당 뒤집어놓을 수는 있겠다”는 것이었다. 교육청의 뿌리깊은 기득권 인맥, 인사 때마다 벌어지는 ‘라인(line)’잡기, 그 와중에 빚어지는 전횡과 부패…. 이런 풍토를 확 갈아엎고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설혹 당선되더라도 1년 남짓한 임기 동안 주 후보가 교육청을 얼마나 바꿔놓을지 의문이 든것도 사실이다. 반면 공 교육감은 정책만큼은 일선 교사들 사이에서도 찬성하는 목소리가 많다. 한 부장급 교사는 “주 후보가 교육감이 된다면 선생들이 편해지고 학교는 한결 조용해질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부추기고, 교사들끼리도 경쟁시키는 일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이 없어져 조용해진 학교에서 결국에는 있는 집 아이들만 따로 ‘조용히’ 사교육을 받아 좋은 대학에 진학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교직도 서비스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교직에서 도태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공 교육감이 꽤 기여했다는 평가다. “다음 기회를 노려 보시라”는 덕담 정도라면 몰라도, 이미 낙선한 주 후보에게 아무리 아쉽다고 말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자칫하면 말리는 시누이라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주 후보에게 품었던 일말의 기대를 공 교육감에게 돌릴 수밖에 없다. 신임 교육감은 수월성 교육에 중점을 두되, 처지는 아이들에 대한배려를 잃지 말라. 실력은 있는데 돈이 없는 학생에게는 예산을 아낌없이 써도 좋다. 마지막으로, 주 후보를 지지했던 많은 표심(票心)과도 힘을 합쳐 서울교육청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라. 수십 년 적폐(積弊)를 갈아엎어라. 나이 일흔넷에 망설일 게 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