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에 김정래 부산교대 교육학과 교수가 쓴 '교사가 절대선(善)에 갇히면'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올 오뉴월은 아이들 보기가 부끄럽고 스스로 자괴심에 빠져든다. 두 달에 걸친 쇠고기 파동 시위는 식품안전이라는 원래 취지를 벗어났다. 근거도 확인되지 않은 광우병을 도화선으로 반미 감정에 편승해 정권 타도를 내건 반정부 시위로 그 성격이 변질돼 버렸다. 최근 난무하는 폭력시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동적 시위와 학생 동원이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외곬 신념에 어린 학생 시위 데려가

    지난달 한 여학생이 ‘집회’에서 “이제 열다섯 살인데, 미친 소 먹고 죽기 싫다”고 한 충격적 ‘외침’이나 심지어 나이 어린 초등학생까지 시위 현장에 집단으로 나온다는 보도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또 며칠 전에는 광우병 동영상을 보여줘 해당 아동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만 사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와 관련한 시위대 역할극을 하면서 대통령 비방 구호를 외치게 한 사례, 초등학생을 학교장 허락 없이 무단으로 집회에 데려간 교사의 문제 등이 보도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쇠고기 파동으로 곤욕을 치르는 대통령에게 학생들로 하여금 격려 편지를 쓰게 한 초등학교 교사가 또 다른 논란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교사의 책무성이고, 다른 하나는 전문직으로서 교사가 갖는 권한 문제이다.

    우선 교사의 일차적인 책무성은 학생들에게 교과를 통해 진실을 가르치는 데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지게 설정된 ‘절대선(絶對善)’에 실체적 진실이 은폐된 작금의 현실에서 교사의 책무성이 실종되고 있다. 무엇보다 광우병으로부터 ‘건강권’을 보호한다는 절대선을 빌미로 이제까지 3억 명의 미국인과 270만 명의 재미교포가 안전하게 먹는 쇠고기라는 실체적 진실은 외면하고 왜곡되고 변질된 시위를 ‘국민저항’인 것처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또 광우병 발병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하더라도 확률문제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교통사고 우려 때문에 아이들을 길 건너편 학교에 보내지 말자고 하는 것보다 못한 억측이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교통안전지도를 철저히 하듯 유사한 방식으로 쇠고기 수입 문제를 다뤄야 한다. 절대선을 설정해 두면 군중심리는 쉽게 따라 움직인다. 역사적으로 ‘마녀사냥’이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군중선동에는 늘 절대선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들에게 절대선을 바탕으로 군중심리에 편승하도록 시위 참여를 부추기는 것은 실체적 진실을 가르쳐야 할 교사 본연의 책무성을 방기(放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교사의 권한은 자의적으로 아무것이나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권리’와 ‘권한’은 엄격히 구분된다. 권리이론에서 ‘권리’의 일부로 논의되기도 하지만 ‘권한’은 개인의 자의적인 선택을 핵으로 하는 ‘자유권’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권한은 법령에 의해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주어지는 재량 내지는 제한된 힘이다. 예컨대, 치과의사가 심장수술을 하는 것은 치과의사 권한 밖의 일이다. 치과의사의 권한이 법령에 명백히 규정되고 제한돼 있듯 전문직으로서 교사의 권한에도 그 실행에 한계가 있다.

    합리적 판단-법치 아닌 떼법 가르쳐

    이번 광우병 문제처럼 근거 없는 사실을 여과 없이 전달하거나 외형만 민주적 방식인 ‘일방적 토론’을 거쳐 왜곡된 가치관을 주입하는 것은 교사 권한 밖의 일이다. 교사가 권한 밖의 일을 일삼으면, 이를 본 아이들은 학생의 본분을 벗어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 권한 준수는 곧 법치를 가르치는 일이다.

    이미 ‘문화행사(?)’에서 폭력시위로 변질된 요즈음의 촛불시위를 통해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합리적 판단력과 법치가 아니라 불법, 탈법, ‘떼법’뿐이라는 사실을 우리 교육자들은 깊이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