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3일 사설 '시위에 밀려 원칙까지 허무는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연이은 촛불집회로 위기에 몰린 정부가 사태 수습책이라며 스스로 원칙을 허무는 일을 벌이고 있다. 포퓰리즘에 야합하는 정부로 타락하고 있다. 민심에 귀를 기울이는 일과 원칙을 지키는 문제는 다르다. 민생 안정을 위한다며 무원칙한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는가 하면, 꼭 필요한 공기업 개혁 등 개혁정책은 덮거나 뒤로 미루고 있다. 쇠고기 파문으로 악화된 여론을 핑계로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만 골라서 벌이는 꼴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저소득층에 대한 통신요금 감면 범위를 대폭 늘린 것은 원칙을 어긴 대표적인 선심정책이다.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의 휴대전화 기본료를 면제하고 이용료의 50%를 깎아주겠다는 것이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 저소득층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고 이들에 대한 배려는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통신업체의 부담으로 통신비를 깎아주는 것은 저소득층의 소비구조만 왜곡할 뿐 이들의 생활고를 실질적으로 덜어주지 못한다. 저소득층의 경제적 부담이 어찌 통신요금뿐이겠는가. 주거비와 식비와 교통비는 어쩔 것인가. 이런 식의 편의적 지원책으로 일관한다면 앞으로 온갖 계층과 이익집단에서 줄줄이 터져나올 감면과 지원 요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기름값이 오르면 기름값을 깎아주고, 교통비가 오르면 차비를 대줄 것인가. 결국은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야 할 이런 식의 땜질 지원책은 뱀이 제 꼬리를 잡아먹는 꼴일 뿐이다. 서민을 지원했다고 생색을 낼 수 있을지언정 책임있는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니란 얘기다.

    정부가 대선의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던 공기업 민영화마저 후순위 정책과제로 미룬 것은 이 정부가 아예 개혁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낼 정도다. 정부와 여당은 당정협의에서 여론 악화를 이유로 “한반도 대운하와 공기업 민영화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상황이 아니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반발이 예상되는 정책은 아예 덮어버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논란이 돼온 대운하는 폐기하거나 미룰 수 있겠지만 집권 초를 넘기면 사실상 추진이 어려운 공기업 민영화까지 싸잡아 연기한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쇠고기 촛불집회에 끼어든 공기업 노조의 반발을 의식한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해석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중장기 에너지 대책의 핵심인 원자력발전소 증설을 포함한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은 이달 말까지 확정하겠다고 했다가 슬그머니 하반기로 확정 시점을 연기했다. 일부 환경단체의 반발에 지레 겁을 먹고 하루가 시급한 국가적 과제의 결정을 미룬 것이다.

    쇠고기 파문에서 여론의 역풍에 호되게 당한 정부가 부쩍 민심의 동향에 신경을 쓰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국민 전체의 민심을 감안한다는 것과 특정 계층의 요구나 이익집단의 주장에 휘둘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민심을 달랜다며 국민 세금으로 특정 계층에 선심 쓰듯 돈을 퍼주고, 이익집단의 기득권 요구에 떠밀려 국가적 과제를 무산시킨다면 이미 정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쇠고기 파문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정부가 민심 무마를 이유로 스스로 원칙마저 허문다면 앞으로 누가 정부의 정책을 믿고 따르겠는가.

    이 정부는 실용을 표방하면서 출범했다. 그러나 쇠고기 파문 이후에 드러난 정부의 행태는 실용이 아니라 무능과 무원칙이었다. 일부 여론에 떠밀려 원칙을 포기하는 것은 실용이 아니라 편의적인 기회주의일 뿐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원칙을 지켜야 잃었던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정책의 추진력도 복원할 수 있다. 눈 앞의 반발이 무서워 정부 스스로가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정부엔 희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