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가 쓴 '협상 약소국'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은 3일 일본 아사히신문의 관련 기사 제목은 ‘이 정권 급락(急落)의 100일’이었다. 왜 ‘급락’이란 표현까지 썼는지 굳이 기사를 읽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시쳇말로 ‘안 봐도 비디오’니까. 그러나 기사에 딸린 시사용어 해설란에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자를 위해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문제’를 설명한 코너였다. 한국의 대미 쇠고기 협상 경과를 간략히 소개한 뒤 마지막에 한 문장을 보탰다. ‘일본의 기준은 (한국에 비해) 한층 엄격해서, 생후 20개월 이하면서 위험 부위를 제거한 경우에 한해 수입을 인정하고 있다’. 기사를 읽은 일본 국민이라면 자국 정부에 대해 신뢰와 자긍심을 가지면서 한국 국민에 대해서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도 느낄 법했다. 새삼 우리 정부의 무능과 빈약한 협상력에 부아가 돋았다.
     
    국제적인 경영컨설턴트로 활약 중인 캐멀 야마모토(52)라는 일본인이 있다. 도쿄대 졸업 후 외교관으로 일하다 인재·조직 컨설턴트로 변신해 미국 실리콘밸리, 중국 상하이 등지를 오가는 사람이다. 그가 지난해에 『독수리형 인간, 용(龍)형 인간, 벚꽃형 인간』이란 저서를 냈다. ‘미·중·일의 비즈니스 행동원리’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미국인·중국인·일본인의 생각과 일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흥미있게 비교 분석한 책이다.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 덩샤오핑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집에서 각자 파티를 열기로 했다면 어떻게 행동할까’도 그중 한 대목이다.

    야마모토에 따르면 미국인은 철저한 업무분담 원칙과 상세한 매뉴얼에 따라 행동한다. 부시의 부인 바버라는 파티용 식재료 목록과 그것을 파는 상점, 교통편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메모를 작성해 남편에게 전한다. 부시는 혼자 힘으로 어렵다고 판단해 럼즈펠드·라이스 등 협조자 10여 명을 모은다. 이들은 쇼핑할 물품의 양과 걸리는 시간을 치밀하게 분담해 각자 작업에 들어간다. 일단 시작하면 다른 이가 무얼 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

    고이즈미는 독신남. 어쩔 수 없이 여성인 다나카 마키코 전 장관에게 도움을 청한다. 다나카는 쇼핑할 사람 5명, 요리할 사람 5명을 각각 부른다. 모두 서로를 속속들이 안다. 이때부터 일본인의 장점인 철저한 협동정신이 발휘된다. 쇼핑팀과 요리팀은 각기 회의를 열어 일을 나눈다. 작업을 진행하되, 미국인과 달리 서로 휴대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보조를 맞춘다. 한 명의 일에 펑크가 나면 여유있는 다른 사람이 즉시 돕는다. 쇼핑팀은 자기 일이 끝나도 쉬지 않는다. 주방에 들어가 요리팀의 일을 돕는다.

    중국인은 세세한 매뉴얼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차부두어(差不多)’라는 중국어 표현대로 그게 그거, 대충대충 일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중국인은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덩샤오핑의 부인은 요리 잘하기로 이름난 상하이 출신 여성들을 불러 쇼핑을 시킨다. 사전에 살 물건을 정하기는 하지만 더 좋은 것이 눈에 띄면 서슴지 않고 품목을 바꾼다. 과정이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의 파티는 훌륭하게 치러진다. “중국인의 특징은 대단히 선명한 목적 의식, 결과 의식”이라고 야마모토는 풀이한다.

    3국의 이런 특징은 대외 협상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미국의 치밀한 업무분담, 일본의 효율적인 팀워크, 중국의 핵심 장악력에 한국은 어떤 장기로 대응해야 할까. 이미 우리는 한·일 어업협정(1998년), 한·중 마늘파동(2000년)과 올해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3국에 차례로 ‘판판이’ 깨졌다.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강동 6주까지 얻어낸 서희, 신생 독립국 지도자이면서도 강·온책을 능란하게 구사해 국익을 지켜낸 이승만을 생각하면 우리가 원래부터 협상 약소국은 아니다. 인재를 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라가 작다면 협상력에서라도 대국·강국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