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천석 주필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삼성 사태를 지켜보면서 왜 축구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 영국 축구 명문(名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미국 프로풋볼 팀 템파베이 구단주(球團主)에게 넘어갔다 해서 온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훌쩍거리며 눈물을 짜는 사람, 맨체스터 팀의 경기 관람 거부 운동에 팔을 걷고 나선 사람 등 가지가지였다. 흘러간 대영제국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던 탓일까. 그러나 그보다 앞서 러시아 석유 벼락부자가 또 하나의 명문 구단 런던 첼시 클럽을 통째로 인수했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005년 여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여자 소프트볼과 남자 야구를 2012년부터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여자 소프트볼은 미국 혼자 너무 강해 관중이 흥미를 잃게 되고, 남자 야구는 올림픽 철이 미국 메이저 리그 시즌 중이라 미국팀이 너무 약한 선수로만 구성돼 경기의 질이 떨어질 게 뻔하다는 이유에서다.

    한국 안의 삼성의 처지가 세계 속의 미국 처지 딱 그대로다. 미국이 끼어 있기만 하면 매듭이 한번 더 꼬이고 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엇비슷하다. 미국은 1945년 세계 경제의 43%까지 도달해 꼭짓점을 찍은 후 대체로 세계 경제의 25% 안팎 수준을 유지해왔다. 삼성의 2006년 매출은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의 20%, 수출도 전체 수출의 20.4%, 투자액과 주식시장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율 역시 각각 25%와 20%대다. 미국의 후진국 원조 총액과 삼성의 사회공헌 역시 똑같이 1위다.

    미국과 삼성의 브랜드 이미지도 사랑과 미움의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서로를 빼다 박았다. 세계 각국 미국 대사관 주변의 단골 풍경은 미국 이민 비자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길고 긴 대열이다. 물론 그 부근에선 요란한 플래카드를 내건 반미(反美)시위도 함께 벌어진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의 주한(駐韓) 미국대사관 언저리 모습이 그랬다. 몇 년 전 고려대학교에서 이건희 삼성회장 명예박사 학위수여식이 학생들의 식장(式場) 봉쇄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나 그전이나 그후나 대학졸업생들은 너나없이 삼성에 들어가기 위해 취업준비반에서 비지땀을 흘려왔다. 고려대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과 미국이 이렇게까지 닮은 꼴이라면 세계를 휩쓰는 반미(反美)주의와 한국 사회 일부의 반(反)삼성 정서도 발생요인이 어딘가 비슷할지 모른다. 다만 미국 정책에 대한 비판과 감성적 반미주의를 구분해야 하듯이 삼성 경영 방식에 대한 구체적 비판과 반(反)삼성 정서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국이 교토기후협약과 지뢰(地雷)금지 협정 가입을 외면하고 이라크 전쟁을 마냥 끌고 나가는 데 대해 비판하는 것과 영국 축구구단이 러시아 벼락부자에게 넘어가는 건 봐 넘겨도 미국부자 손에 떨어지는 꼴만은 죽어도 못 봐주겠다는 정서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마찬가지로 삼성이 편법 상속 방식을 동원하고 차명계좌에 막대한 주식을 숨겨놓고 사회 전체를 향해 전방위(全方位) 불법로비를 시도한 데 대한 비판과 막연한 반(反)삼성정서와는 근본이 다르다.

    부시행정부는 세계의 미국 정책 비판까지 '1등 국가' '패권(覇權)국가'에 으레 따르는 어쩔 수 없는 역풍(逆風)이라 치부하고 그 원인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방주의 외교를 펴면서 '선제공격(Preemptive Attack)' '예방전쟁(Preventive War)'이란 무시무시한 용어를 아무렇게나 써대는 바람에 반미주의를 더 넓게 퍼뜨리고 'Mr. BIG(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고릴라)'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얻어듣게 됐다.

    삼성이 부시마냥 삼성에 대한 객관적 비판을 '1등 기업' '패권기업'이 치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코스트 정도로 흘려 넘기는 건 큰 착각이다. 우리 사회 바닥에는 삼성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삼성의 울타리 안에 있는 기업들이 기업의 한계를 넘어 정치·사회·문화·예술·언론의 영역을 간섭하고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분명히 깔려있다. 대한민국을 떠받쳐온 이런 다양한 구성요소들 간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삼성 바람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날, 그 위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총체적 위기로 번져 나갈지 모른다고 염려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삼성은 내일을 위한 교훈으로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