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 '에디터칼럼'에 이 신문 김종혁 사회부문 에디터가 쓴 <'부패의 추억' 못 버리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투표권이 있던 분들은 다 기억할 것이다. 그때 선거라는 게 어떤 모양새였는지. 동네 아줌마들이 통·반장 따라 불고기집 가서 한 상 잘 먹고나면 누군가 불쑥 나타난다. 뻔하다. 모 후보의 선거운동원. “분골 쇄신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뭐 그런 객쩍은 얘길하고 사라지는 거다. 어떤 때는 5만원 정도를 고무줄로 돌돌 말거나 아니면 봉투에 넣어 슬쩍 건네기도 한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아주 흥청망청했다. 선거비용이 2조네, 3조네 하면서. 물론 후보자들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국회에 가면 쓴 돈의 열 배, 백 배를 뽑으니까 그랬던 거다. 그 사람들이 바본가.

    고백컨대 유권자에게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부패 정치인들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함께 물들였다. 기자들 말이다. 나도 90년대 중반에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을 출입했었다. 호텔 건물 뺨치는 당사와 연수원을 소유한 그 당에서 벌어지는 흥청망청을 목격했다. 그 돈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기업에 손 벌리고 또 받은 만큼 반대급부도 줬을 것이다. 그걸 보며 한편으론 걱정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적당히 편승했었다. 지금도 부끄럽고 민망하다.

    97년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가 됐다. 나는 그게 우리 사회가 거대한 정치부패의 사슬에 칭칭 묶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보면 노무현 정권은 큰일 했다. 막걸리 먹이고 고무신 주던 50년대부터 불고기 사주고, 야유회 보내고, 조기축구회 매수하던 90년대까지 돈 선거가 끊이질 않았는데 그걸 뿌리 뽑은 것이다. 지난 5년간 노 대통령이 정치를 잘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든다. 그래도 선거문화를 개선한 건 인정해야겠다. 그건 진보정권의 공이다.

    “그게 노무현이 잘한거냐. 시대가 달라지고 민도가 높아져 그런 거지.” 그런 주장을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과연 그럴까. 이번 4·9 총선을 보자. 총체적으로 보면 민도가 더 떨어졌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지옥에라도 간 줄 알았던 돈 선거의 유령은 스멀스멀 되돌아왔다.

    “오, 뭔소리. 이번 총선은 훨씬 깨끗했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숫자상 그렇다. 17대 총선 땐 2241명의 선거사범이 입건됐고 275명이 구속됐다. 이번엔 894명이 입건돼 34명이 구속됐다. 10분의 1밖에 안 된다. 한데 내용을 따져보면 다르다. 17대 총선 때 선거사범이 급증한 건 여야의 당내 경선 과열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거 기간이 이례적으로 짧았던 이번 총선에선 유권자에게 금품 돌리다 잡힌 게 224명이다.

    한나라당은 10년 전 부패 세력으로 몰려 정권을 잃었다. 당사와 연수원을 다 팔고 천막으로 갔다. “다시는 안그럴테니 용서해 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국민은 그런 석고대죄를 진심이라 믿었고 받아줬다. 뉘우치는 자여, 보상을 받으리니. 해서 한나라당 지지도는 한때 60%를 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돈 선거 논란을 일으킨 건 주로 보수 쪽 후보들이다.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대체 유권자인 우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친박연대 비례대표 1번을 받아 서른 살 국회의원을 앞둔 양정례씨는 기자회견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제가 이번에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는데요, 제가 젊은 여성이라는 걸 친박연대가 높이 산 것 같아요.”

    솔직히 어이가 없다. 비례대표는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나 여러 직능군의 대표를 국회로 보내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자는 취지다. 학력과 경력과 재산 형성에 골고루 의혹이 얹혀있는 양씨는 대체 누굴 대변하는 걸까.

    세간엔 “진짜로 특별당비 1억원 내고 국회의원 됐다면 로또복권 당첨된 것”이라는 비아냥이 나돈다. 장관급 대우를 받는 국회의원에게 제공되는 6명의 보좌진과 의원회관, 각종 경비 지원과 혜택을 따지면 진짜 남는 장사 한 거다. 국정이야 어찌되든.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고들 한다. 한데 이번 선거를 보면 보수는 ‘부패의 추억’이 달콤하고 새록새록한 모양이다. 나쁜 습관을 고치는 건 그만큼 어려운 것인가.

    한 가지만 더 말하자. 유권자도 바보는 아니다. 부패한 보수 덕분에 한번 된통 당했었다. 하지만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서 넘어간 거다. 그런데 또 그래? 그럼 더 이상 안 참는다. 보수, 5년 뒤에도 정권 잡는다고 장담마라. 진보도 지난번에 그러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