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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8일치 여론면 '세상읽기'에 배병삼 영산대 교수가 쓴 '주몽, 혁거세 그리고 이명박'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 주말에 부활절 달걀을 받았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성경 구절이 씌어 있었다. 죽었다 되살아나 진리를 증명한 예수의 삶을, 어둠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병아리에 비유한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오는 스토리는 난생설화를 건국신화로 가진 우리에겐 퍽 낯익은 것이다.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가락국의 수로가 모두 알에서 태어난 건국자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알을 깨고 나오는 방식이다. 이 점에선 특히 주몽과 혁거세가 대비된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의 경우 “부족장들이 알을 쪼개어 어린 사내를 얻었다”(剖其卵得童男)고 하였다. 주어가 부족장들인 데서 보이듯 나라의 실권자는 껍질을 깨준 토착세력들이었다. 그를 길러 알영과 결혼시킨 것도 그들이었다. 곧 혁거세는 알을 깨준 보호자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살다 간 것이다.
반면 고구려의 주몽은 “스스로 알껍데기를 깨부수고 나왔다”(破殼而出)고 하였다. 태어났을 때 모습이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했다’고 묘사된 데서도 그의 삶이 혁거세와 다를 것임을 예고한다. 역시 그는 부여로부터 새 땅을 찾아 떠났고 또 새 나라를 제 힘으로 세운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온통 뒤죽박죽이다. 여당의 지지율은 반 토막이 되었고, 대통령의 얼굴이나 말투에서도 초조감이 엿보인다. 스스로 “상황이 너무 어렵다”고 토로할 정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를 항해에 비유한 것은 오랜 전통이다. 예측할 수 없는 바다 속과 풍랑을 헤치며 ‘길 없는 길’을 만들면서 목적지에 닿아야 하는 형국이 정치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를 운명과 대결하는 것으로 본 마키아벨리의 통찰은 내내 기억해둘 만하다.
정치가 항해라면 배는 정부일 것이다. 오늘의 혼란은 바다의 특성과 배를 아는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선장을 알고 그의 항해 방침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뽑으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요컨대 ‘나’를 아는 사람을 뽑으려 했던 데 있다. 이것이 ‘초짜 장관’과 ‘고소영’, ‘강부자’ 내각으로 시작부터 뒤엉킨 까닭이다. 또 난데없는 ‘생육신’이 55명이나 태어난 까닭이다.
주몽이 깬 것은 다른 껍질이 아니었다. 현대건설 경영자였던 ‘나’, 서울시장이었다는 ‘에고’, 새벽에 일어나 앞장서면 부하는 따르기 마련이라는 습관적 생각이 다 껍질인 것이었다. 불교식 어투를 빌리면 지금의 ‘나’는 과거 인습의 그림자로 뭉쳐진 덩어리다. 주몽이 깬 것은 이 과거의 이력과 경험이라는 껍질이었다. 그것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지만, 새로 정치지도자가 된 나는 그것들을 추억하고 되새겨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습관과 경험의 땅인 부여를 박차고 나와, 돌아오지 못할 강(엄수)을 건너 새 땅을 향해 나아간 것이다. 이것이 껍질을 부수고 나온 것의 의미다. 주몽은 고작 경영자, 행정가였던 ‘나’를 벗고 새로운 정치가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대통령은 자주 시장 시절의 성공 사례나 경영자로서의 경험을 담화의 소재로 삼던데, 도리어 그런 성공의 추억들이 나를 둘러싼 껍질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식상한 박정희 시대 통치를 흉내내거나 이익의 달성을 목표로 삼는 기업 경영을 모방하는 데 그친다면 이건 고작 혁거세의 수동적 삶에 불과할 것이다. 나아가 그의 알을 깨는 데 도와준 이들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내내 보호자의 품을 벗어나지 못했던 혁거세의 정치적 삶과 더욱 다를 바 없다. 새로운 항로를 만들어 가는 겸손하고 신중한 선장의 자세에서 비로소 정치가(주몽)의 길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