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7일자 오피니언면 '특파원칼럼'에 이 신문 선우정 도쿄특파원이 쓴 '정치가는 원래 비정규직이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힙니다.

    얼마 전 일본 중의원 국회의원과 저녁을 함께했다. 의원 보좌관과 의원의 아들, 소속 관청(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선 관청 정무관이 국회의원 몫이다) 부하 직원 등 6명이 모였는데, 식대를 딱 6등분 해 6000엔씩 '더치페이'를 했다. 의원 아들도, 보좌관도 예외 없이 냈다. 일본에선 더치페이를 뜻하는 '와리캉(割勘)'이 일반적인 계산법이다. 하지만 국회의원까지 갈라내는 것을 보니 생소하기도, 나름대로 신선하기도 했다.

    도쿄에선 '벤쿄카이(勉强會)'란 공부 모임이 종종 열린다. 관심 분야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여기에 의원들이 자주 초대된다. 권력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일본엔 전공 분야를 가진 국회의원들이 많다. 이들 이야기를 들으면 웬만한 전문가 못지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회원들이 돈을 모아 밥을 사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앞서 언급한 더치페이 국회의원은 '한국'을 정치 인생의 전공 분야로 삼고 있다.

    일본 국회의원이 누리는 특전 중에 신칸센(일본의 고속열차) 특석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나가타초(일본 국회가 있는 곳)와 지역구를 빈번히 오가야 하는 업무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신칸센 도쿄~오사카 구간이 편도 1만4000엔(약 14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더치페이' '벤쿄카이' '신칸센 특석'의 심리적 배경엔 일본 국회의원들의 초조감이 있다. 돈을 아끼고, 공부하고, 지역구를 눈썹이 휘날리도록 챙기지 않으면 퇴출될 위험성이 늘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일본 국회의원(중의원)의 임기는 한국처럼 4년이지만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서 임기가 지켜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 평균 2년이면 족했다. 정치가 꼬이면 총리가 언제든지 국회를 해산하고 선거 정국에 돌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 실력자였던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의 유명한 말이 있다. '가수는 1년, 총리는 2년짜리 쓰카이스테(使い捨て)'란 말이다. '쓰고 버린다'는 뜻의 '쓰카이스테'는 우리말로 '일회용'으로 풀이된다. 일본에선 비정규직을 '일회용'이라고 부른다. 가수는 임기도, 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완전경쟁시장의 대표적 비정규직으로 꼽힌다. 일본 총리는 가수보다 사정이 좋지만 평균 2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이런 말을 했다. 한국 '탄돌이'처럼 2005년 '우정민영화 정국' 당시 무더기로 당선된 일명 '고이즈미 칠드런(children)'에게 던진 말이다. "정치가야말로 일회용이다. 그게 싫으면 정치를 포기해라." 다음 공천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이 한마디로 고이즈미 인기가 다시 수직상승했다.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환호한 것이다. 일본에서 비정규직이 양산된 시기는 고이즈미 총리의 재임기(2001~2006년)였다. 정치란, 대중이란, 이런 것이다.

    정치가야말로 비정규직이다. 민의에 따라, 권력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대표적인 일회용 직업이다. 하지만 한국엔 국회의원이 정년을 보장받은 정규직이라고 확신하는 정치가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한쪽에선 공천을 생살여탈권처럼 휘두르고, 한쪽에선 임기 4년을 다 채우고도 공천을 못 받았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면 틀림없이 그렇다. 수많은 사오정, 삼팔육이 거리를 헤매는 이 시대를 생각하면, 한국 국회의원들의 행태가 어찌 좀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 염치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