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에 이 신문 홍찬식 논설위원이 쓴 '정연주를 내버려 두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른바 진보 진영의 역공이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빌미를 준 쪽은 이명박 정부다. 정권을 내주고 의기소침해 있던 진보 단체들에 ‘오륀지 소동’과 ‘부자 내각’ 같은 좋은 사냥감을 별생각 없이 제공했다. 새 정부의 잇따른 실점으로 진보 진영은 뜻밖의 호재를 만났다. 안 그래도 10년 전의 투쟁심을 되살리며 속으로 벼르고 있던 터다. 민심의 분위기도 3개월 전 대선 직후와는 크게 다르다. 

    새 정부의 실수, 진보의 역공

    새 정부에 또 한번의 시험대가 도사리고 있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주도하고 있는 문화계 ‘코드 청산’ 작업이다. 유 장관은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달라”고 요구했다. 지금까지 단체장 4명이 사의를 표명했으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는 인사들이 훨씬 많다. 진보 진영은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반전의 기회가 그 안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새 정부가 지난 정권 사람들을 내보낸 단체장 자리에 이번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임명했다고 치자. ‘코드 인사’로 맹공을 가할 수 있다. 문화의 다양성을 해치는 매카시즘으로 몰아세워도 된다. 지난 정권 때 문화계 요직을 차지했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은 벌써부터 유 장관을 ‘완장 찬 홍위병’ ‘권력의 나팔수’라고 공격하고 있다. 5년 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을 때와 공수(攻守)가 뒤바뀐 꼴이다.

    그러나 진보 진영에도 허점은 많아 보인다. 버티기를 시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사는 정연주 KBS 사장이다. 그는 2006년 11월 노무현 코드로 연임에 성공한 뒤 KBS 노조가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이자 주차장 출구로 역주행해 회사로 진입했다. 이때 이미 KBS라는 조직의 수장으로서 정당성을 상실했다. 그는 적자경영을 해온 무능 인물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공영방송 사장으로서 부적격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일부 진보 단체들은 ‘정부가 공영방송 사장을 물러나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새 정부의 퇴진 요구에 반대하고 있다. 외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방송 독립’이라는 내부 논리를 고수하기 위해 부적격자까지 감싸는 모습이다. 진보적 가치인 도덕성, 유연성, 개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정 사장 본인도 ‘방송 독립을 지키기 위해 임기를 지켜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으나 그를 ‘독립투사’로 생각하는 사람은 더는 없다.

    사정이 이럴진대 새 정부는 ‘정 사장은 그만두라’며 입 아프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기보다는 당분간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그가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진보 진영엔 짐이 되고 손해이기 때문이다. 또 공영방송 개혁이 절실함을 국민에게 생생히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가 사장으로 있는 것에 직원의 80%가 반대할 만큼 그에게 등을 돌린 KBS 구성원들이 새 정권 아래서 그의 지시에 순순히 따를지도 의문이다.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정 사장이나 KBS 쪽이다.

    문화권력 교체에 무리수 없어야

    이번 공방에서 밀리면 어느 쪽이든 4·9총선에서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명분 싸움이다. 새 정부는 노 정부가 과거에 했던 방식을 피해야 한다. 새로 임명하는 후임자들은 전문성과 경영능력을 최대한 고려해 인선하고 교체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지 말아야 한다. 유 장관은 벌써 ‘비리 폭로’ 발언과 같은 몇 가지 실수를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주 “아직도 야당과 같은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으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이번 공방에서 당당하고 의연한 대처로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보수가 전투에 능한 진보에 맞서려면 강하고 쇄신된 면모를 보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