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 '시론', 소설가 복거일씨가 쓴 '점잖음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 정권 아래서 임명된 정부 산하 기관 임원들의 처신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문제의 뿌리는 임기가 끝나가던 노무현 대통령이 그들을 임명한 일이다. 물러나는 대통령은 원래 빈자리들을 채우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 후임 대통령이 산뜻하게 시작하라는 배려다. 그것이 점잖은 일이다.이명박 당선자측에서 명시적으로 삼가달라고 요청했는데도 노 대통령은 굳이 그들을 임명했다. 점잖은 일은 못 된다.
그렇게 임명된 사람들이 임기를 내세우면서 버틴다. 정부 산하 기관들은 정권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정책을 집행한다. 이번 경우처럼 새 정권의 이념적 지향이 본질적으로 다르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점잖은 처신이다. 10년 전 우파에서 좌파로 정권이 바뀌었을 때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게 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물음이 나온다. "왜 좌파는 그렇게 점잖은 관행을 따르지 않는가?"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사람들이 예외 없이 보이는 그런 행태를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람마다 품성이 다르니 그들의 품성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그들이 공유한 이념적 지향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합리적일 터이다.
우파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유주의를 따랐다. 개인의 자유와 판단을 한껏 존중하는 이념이므로 자유주의는 개인의 책임도 강조한다. 자연히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도덕성을 비교적 깊이 인식한다. 점잖게 처신하려는 노력은 거기서 나온다.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위선적 행동이라도 하려 애쓴다.
노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이 따른 이념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민족사회주의다. 그런 전체주의는 가치의 궁극적 귀속처가 사회며 개인들은 사회에 봉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의 가치를 실현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전체주의에선 객관적 도덕이 존재할 수 없다. 특정 사회에 이익이 되는 행동들만이 도덕적이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모두 비도덕적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전체주의 사회엔 절차적 안정성이 없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반역자가 되고 오늘의 충성스러운 행동이 내일의 전복적 활동이 된다. 그런 상황에선 점잖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점잖음은 중요하다. '점잖으면 손해 본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우리 사회에서 여겨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점잖음은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다. 지난 정권 내내 우리가 넌더리를 낸 비속함은 점잖음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은 데서 나왔다. 미국 작가 렉스 스타우트의 말대로 "예절은 선택의 문제지만, 점잖음은 삶에 대한 빚이다."
그러면 점잖음을 모르는 채 마냥 버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일에서도 자유주의는 우리에게 길을 보여준다. 임기가 있든 없든 사람을 어떤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일에선 절차를 따라야 한다. 절차적 정의는 자유주의의 본질적 부분이고 절차적 안정성을 지닐 수 없는 전체주의의 속성과 대조된다. 전체주의에선 목적이 모든 수단들을 정당화하지만, 자유주의에선 정의롭지 못한 절차는 목적 자체를 훼손한다.
역사는 자유와 권리가 선택적으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킬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까지도 지켜주려 애쓸 때 비로소 자유와 권리가 온전히 지켜질 수 있다. 점잖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점잖게 대하는 일은 성가시고 더디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절차적 정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우리는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인 자유주의에 큰 흠집을 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