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흔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하는 세 곳을 꼽으라면 호남향우회·고대동문회·해병대전우회라고들 한다. 이명박 후보는 고려대 출신이다. 그래서 한때는 “이 후보 주변에 고대 출신들이 인의 장막을 쳤다”는 악성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 그 이후 이 후보는 고대 출신들이 옆에 오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최근 시중에 나도는 유머 하나를 들었을 때 귀가 솔깃했다. “고대 출신들이 분골쇄신하면서 이명박을 돕는다”는 말이었다. 이어지는 말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살신성인’의 당사자는 바로 신정아씨 사건에 연루된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삼성 관련 폭로를 주도한 김용철 변호사라는 것이다. 변·김 모두 공교롭게도 고대 출신이다. 그들이 이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이런 사건을 일으켰을 리 만무하다. 결과적으로 이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을 뿐이다. 이를 유머로 만들어 낸 일반인의 정치 감각이 놀랍다.

    7월 초 시작된 신씨의 학력 위조 사건은 한나라당 경선 국면에서 불거진 이 후보의 ‘자식을 위한 위장 전입’ 파문을 상당히 희석시켰다. 이른바 시선 분산효과 덕을 본 것이다. 신씨 사건에 변씨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알게 모르게 대선 국면에 영향을 끼쳤다. 친노 세력의 선두 주자였던 이해찬 전 총리가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경선에서 탈락하는 데 일조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 개입할 여지를 확 줄여 버렸다. 또 범여권의 지지 기반이던 ‘호남+진보’의 재결집 의지를 약화시켰다. 그 결과 이명박 후보는 상당 기간 공세를 피할 수 있었다. 김 변호사의 폭로도 이 후보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BBK 사건’ 공세로 인한 지지율 저하를 막아 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 역시 시선 분산효과를 가져온 셈이다.

    ‘골골 80’에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기왕이면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고, 위기는 피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힘과 힘이 격렬하게 맞부딪치고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 현장에서는 누구나 위기를 맞는다. 그 세계에서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지 못하면 끝이다. 거기서 주저앉으면 낙오자가 될 뿐이다.

    이명박 후보에게 BBK 사건과 이회창씨의 출마는 최대의 위기였다. 대선이 아직 9일 남기는 했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만으로 볼 때 이 악재를 잘 관리했다. 대선 기간 중 어차피 몇 차례 위기가 닥친다. 그런데 이 BBK 의혹이 워낙 그럴듯하고 파괴력이 엄청날 것으로 보였기에 범여권은 이곳에 화력을 집중했다. 올 하반기 대선 국면은 BBK로 시작해 BBK로 끝났다. 이 후보 자녀의 위장 취업 파문도 김경준씨 소환에 묻혀 버렸다. 이 후보 입장에서는 BBK가 ‘훌륭한 미끼’ 역할을 해준 셈이다.

    이회창 후보의 출마라는 악재는 측근 이재오 의원을 희생양으로 삼아 박근혜 전 대표를 끌어들임으로써 돌파했다. 지금 현상은 어떤가. 이명박 후보는 지지율 40%를 넘긴 상황에서 이회창 후보와 정동영 후보가 15∼20%로 2위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하고 있다. 이회창씨가 출마하지 않았더라면 대선은 이명박-정동영의 2파전으로 흘렀을 것이다. 여기에 범여권 후보의 단일화가 성사됐다면? 지금쯤에는 상당히 근접한 게임이 돼 있지 않았을까. 이회창씨의 출마 강행이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대선에서 변화의 여지를 많이 줄여 놓았다.

    악재도 잘만 ‘관리’하면 호재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일단 이명박 후보는 이런 측면에서는 성공한 듯하다. 정치에서 위기관리능력은 큰 덕목이다. 그러나 도덕성과 위기관리능력은 별개 문제다. 이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이 도덕성에 대한 의심의 그림자는 수시로 발목을 잡을 것이다.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후보가 선택할 길은 ‘도덕적 대통령’ ‘존경받는 대통령’이 아니라 ‘일 잘하는 대통령’으로 잡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