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문창극 주필이 쓴 '상처는 드러내야 아문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청와대를 방문한 고 윤이상씨의 부인 이수자 여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렸다. 80 노구인데 갑자기 큰 절을 하는 바람에 대통령도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이 여사는 큰 절의 이유를 노 대통령이 윤이상씨의 명예회복을 시켜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했다. 윤씨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994년 김영삼 대통령 때 그의 귀국이 구체적으로 추진된 적이 있다. 우리 정부는 윤씨에게 친북활동에 대한 유감 표시를 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해외 친북단체 등에서는 그의 귀국을 적극 말려 그가 서울행 비행기표까지 샀다가 포기했다는 증언도 있다.

    윤씨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67년 강제 납치되어 무기징역형을 받았으나 독일 등의 항의로 2년 만에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그 이후 그는 해외에서 음악활동과 병행하여 친북적 활동을 펴왔다. 그의 친북활동은 이 사건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못 이겨 재떨이로 머리를 찧어 자살까지 시도한 바 있다. 이런 그가 한국을 곱게 볼 리가 없다. 북한은 이를 이용하여 그에게 더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씨 부부는 김일성의 배려로 평양에 저택을 선물받아 독일과 평양을 오가며 살았고, 북은 그를 위하여 평양 중심거리에 15층의 현대식 건물인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세워주었다. 어떻게 보면 남쪽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천재 음악가를 북한에 빼앗긴 것이다. 

    여기서 한 비극적 음악가를 정치나 이념으로 재단할 생각은 없다. 예술은 예술로만 보아 주어야 한다. 그가 감방에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완성하던 모습은 그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감방에는 책상이 없어 악보용지를 바닥에 놓고 쪼그리고 앉아 일을 했습니다. 손이 시리고 곱아 두 세 소절을 쓰고는 입김으로 손을 녹여야 했습니다. 이전에 썼던 음향을 떠올리고… 이렇게 해서 다시 음악적 판타지 안에 살 수 있게 되자 고통도 절망도 잊고 자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옥중에 있었지만 마음까지는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가끔 나는 행복하기조차 했습니다. 나는 내 안에 떠오르는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윤이상 상처입은 용: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이 정부 들어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는 몇 가지 점에서 혐의 사실을 인정했으나 간첩 혐의는 없었다고 밝혔고 국제법을 무시한 납치는 잘못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아마 이를 토대로 윤씨의 부인은 “정치적으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쪽에 사는 나로서는 윤씨의 또 다른 한 면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김 주석을 대할 때마다 머리가 숙여진다. 그의 접견을 받을 때마다 너그럽고도 자비로운 인정미를 느끼곤 한다”는 등의 김일성에 대한 감사와 찬양은 예술가의 선을 넘었다. 그가 음악으로 민족에 기여했다는 작품 ‘나의 땅 나의 조국’에 대해 “노동, 인민, 평등 같은 용어들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민족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오로지 찢어진 심장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통일의 그날을 기다리는…”(내 남편 윤이상, 이수자) 등과 같이, 그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체제 홍보 음악가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무수히 많다.

    “현정부에서 초청해 주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이씨의 말대로 남쪽 정부는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렇다면 윤이상씨 부부는 한국 정부나 국민에게 할 말이 없는 걸까? 나는 지난 일을 잊고 품어 주자는데 반대하지 않는다. 특히 그는 음악으로 나라를 빛낸 사람이다. 그만큼 소중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성공한 예술가는 무엇이든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인가. 정치나 권력이 예술을 간섭하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예술의 영역은 자유다. 그러나 예술의 이름으로 한 체제를 찬양한다면, 특히 그 체제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체제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개인의 원한을 풀어준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는 국가로서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그의 예술은 포용하되 그의 정치에 대해서는 분명히 할 말을 해야 했다. 그의 귀국이 지금까지 어려웠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기자회견에서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끄집어 내지 않았다. 예술가의 명성에 눌려서인가 아니면 의식의 마비인가. 이씨는 출국 전에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상처는 드러내야 빨리 아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