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신우 논설위원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요즘 온난화가 세계적 화두다. 지구의 미래를 파괴할지도 모를 온난화는 인류가 에너지를 과소비하면서 배출하는 CO₂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CO₂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법이 있다. 전 인류가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의외로 간단한 해답이긴 하나 혹시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상적 환경주의자’ 취급을 당할 것이다. 사회주의에도 이런 유의 흐름이 있다.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 산업혁명 당시 글래스고 근교의 뉴 래너크 방적공장에서 ‘박애주의 경영’을 시도한 로버트 오언이다.

    오언이 경영하는 이 공장에서는 다른 공장의 하루 평균 14시간 노동시간보다 훨씬 짧은 10시간만 일하면서도 더 많은 임금과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노동환경 개선이 오히려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생산성’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을 때니 만큼 놀랍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언의 실험은 단막극으로 끝나고 만다. 뉴 래너크는 물론 오언이 미국으로 건너가 세운 공동체 ‘뉴 하머니’ 역시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실패의 원인은 공동체 이념인 평등 추구와 그의 독재적 성향에 있었다.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다. 노동과 삶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되 ‘가치체계를 일 중심에서 삶 중심으로 바꾸자’는 아름다운 말도 빼놓지 않고 있다. 왠지 모르게 오언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런 내용들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사람입국신경쟁력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도 같은 주장을 해왔다. 우리나라의 과로 근로자 900만명을 평생학습 쪽으로 바꿔준다면 유럽 등에서 이룩한 일자리 나누기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요지였다.

    그럼 그의 이런 분홍빛 청사진은 실현 가능한 것일까. 불행히도 현재로서는 부정적이라는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멀리 오언의 예를 끄집어낼 것도 없이, 최근의 유럽에서조차 그가 모방하려는 실험은 실패로 판명나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프랑스 사회당 정부는 주35시간제를 도입하면서 “노동시간을 10% 줄이면 기업의 추가 비용 없이 7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후인 2005년, 프랑스 하원은 주35시간 근무제의 완화법안을 압도적 표차로 승인했다.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삭감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프랑스식 노동정책이 실패로 끝났음을 만천하에 고백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원 투표를 전후로 프랑스 언론에서는 고용사정이 더 악화됐다는 보도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는 유럽 주요국 전반에 걸쳐 공통된 현상이었다.

    외환위기 당시 국내의 어느 진보 정치학자가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확대를 ‘경제적 가치 일변도로 살아온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생활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자기 개발과 여가를 즐기며 살 수 있는 문명의 대전환’이라고 높이 평가한 것이 지금도 귀에 선하다. 그러나 그 진보 학자가 프랑스의 자아 비판 앞에서 어떤 식의 새 논평을 내놓았는지는 아직 들은 바 없다. 그저 문국현씨가 충실하게 그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노동시간 단축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노동생산성과 연결될 수 있느냐다. 다시 말해 생산성이 향상되는 한에서만 논리적 타당성을 가질 뿐이다. 게다가 오언이나 문국현씨가 이끈 자그마한 기업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느냐의 여부도 불확실하다. 아니, 실패의 확률이 높다는 점을 프랑스는 온몸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오죽하면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조차 프랑스 국민을 향해 ‘이제 머리는 그만 굴리고, 일을 더 합시다’라고 호소하겠는가.

    일부 진보·좌파 언론이 문국현씨를 띄우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언이 꿈꾸던 유의 공상 사회주의 실험이라면 사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