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여권 대선 주자 한 사람이 2일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인질사태가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비롯됐으니 미국이 나서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면서 이를 공개했다. 여권 의원 33명도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의 머릿속에 사태 해결에 대한 염원이 더 컸는지, 아니면 자신들 앞에서 돌아가는 TV 카메라가 더 크게 보였는지 궁금하다.

    이들은 “미국 정부는 인질이 미국인이었다면 어떤 조치를 취했겠느냐”고 물었다. 미국은 이라크전쟁 이후 단 한 명의 예외만을 제외하고 인질 협상을 거부했다. 그 결과 미국인 6명이 죽었고 10여명이 생사 불명이다. 여권 정치인들이 요구하듯이 미국 정부가 이번 한국인 인질들도 미국인 인질처럼 대하면 어떤 결과가 오겠는가.

    지금 청와대 대변인은 사흘 연속으로 “아프간 정부가 더 중요하다”면서 반미 단체가 “미국이 나서라”고 요구하는 것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도 “기본적으로 우리 국민이 가지 말라는 곳에 잘못 들어가 생긴 문제”라며 “이를 미국 책임이라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라고 했다. 그는 “미국이 우리 교도소에 있는 죄수를 풀어주라고 한다고 우리가 풀어주겠느냐”고 반문했다. 다른 여권 대선 주자조차 “미국도 인질을 구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라며 “이를 (반미) 정서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비인도적”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 정부와 상의를 잘해야 하고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며 “잘못하면 인질범에 이용당한다”고 했다. 이게 상식이다.

    그래도 5개 정당 원내대표들은 미국에 협조를 구한다며 이날 단체 출국했다. 엊그제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얘기가 나와 그날 밤에 비행기표를 샀다고 한다. 미국서 만날 사람 약속이 돼 있을 리가 없다. 미국 가서 공개적으로 떼쓰는 게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느냐를 떠나서 이것도 외교인데 이렇게 대책 없이 가고 보자는 것이 정말 ‘한국 정치’ 수준 그대로다.

    이 무작정 미국행에 한나라당도 따라갔다. 한나라당은 2002년 미선·효순사태 때 반미 기세에 눌려 촛불시위에 동참했던 전력이 있다. 이번 일이 제2의 미선·효순사태로 번질까 벌써 겁이 나는 모양이다.

    지금 여권 일각의 행태는 아프가니스탄사태의 비극 앞에다 정치 장사 좌판을 하나 벌여 놓고 어떻게 세를 얻을 수 없을까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다. 그 좌판에 혹시 사람이 몰릴까 두려워 야당도 근처를 기웃거리는 꼴이다. 당내 경선도 있고 대선도 있지만 이용할 것이 따로 있다. 국민은 두 번 속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