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정갑영 연세대 원주 부총장(경제학 전공)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19년 미국은 금주법(禁酒法)을 제정한 바 있다. 식량을 절약하고, 작업능률을 향상시키며, 범죄를 줄이자는 명분과 양조업을 하는 독일계 이민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 결과 주류의 제조와 판매, 운반을 금지하는 3금법(三禁法)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6000년 이상 된 음주 습관을 몇 줄의 법안으로 막는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시도였다. 알 카포네로 대표되는 마피아는 물론 수많은 밀매 조직이 등장했고, 대도시에는 무허가 술집까지 번창하였다. 술값은 치솟고 마피아는 떼돈을 벌었지만, 양조업은 금주법의 위세에 밀려 몰락해 버렸다. 부유한 사람들은 캐나다로 술을 마시러 갔지만, 서민들은 독성이 강한 저질 알코올로 멍들어 갔다. 사가(史家)의 지적대로 1920년대 미국은 금주법이 만들어 낸 광란의 시대였고, 그 모습은 영화 ‘언터처블(Untouchables)’에 잘 그려져 있다.

    그 혼란의 시대가 남겨준 교훈은, 인간의 본성과 경제적 욕구를 통제하는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는 명제였다. 그런 오만은 당초의 목표와는 달리 오히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왜곡시키게 된다.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부동산 정책이나 분배 지향적 접근도 역설적으로 양극화와 빈부 격차를 확대시키지 않았는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교육정책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교육을 정상화시켜 사교육비를 줄이자는 데 누가 이견을 달겠는가. 그러나 3불(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를 금지하는 현 정부의 교육 정책)과 같은 획일적 규제와 평준화 이념으로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왜 그러한가? 좋은 대학을 가고 싶고, 좋은 학생을 뽑으려는 기본적인 욕구를 정부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행 제도를 살펴보자. 수능성적은 등급만 주고, 학교별 내신 차이도 인정하지 말라면, 대학은 어떻게 학생을 선별할 수 있겠는가. 수만 명이 같은 등급에 몰려 있고, 고교 수준도 천차만별인데, 실력을 무시하고 로또식으로 뽑는다면 얼마나 비교육적이고, 불공평한가. 이 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좋은 학교의 똑똑한 학생들이다. 이들을 모두 “부자동네의 아이들”로 치부하여 역차별하는 것이 바른 정책인가. 당장 수능과 학교별 성적이라도 공개해야 실력대로 평가할 수 있고, 본고사 압력도 줄어든다.

    수능과 내신은 도움이 안 되고, 본고사는 금지되어 있으니 대학은 변별력의 수단으로 논술을 부과한다. 결국 공교육의 성과인 내신보다는 논술 한 장이 당락을 좌우하는 셈이다. 3불로 내신이 제 역할을 못하니, 어떻게 공교육이 정상화되겠는가. 이런 현실에서 학생들은 현명하게(?) 학원으로 줄달음친다. 평준화된 공교육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자기 눈높이에 맞는 보충수업과 논술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3금(禁)으로 음주를 막을 수 없듯이, 3불(不)로는 공교육의 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 밀주(密酒)처럼 값비싼 사교육만 번성하고, 부유한 가정은 캐나다로 술을 사러 가듯 아예 아이를 조기 유학 보낸다. 소외계층은 저질의 알코올을 마시듯 공교육에 의존하지만, 학교는 사라지는 양조업처럼 더욱더 황폐화되고 있다. 과연 누가 가장 큰 피해자인가.

    이제 교육정책도 글로벌 규범으로 전환해야 한다. 세상에 학생 선발까지 간여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게다가 사학법으로 지배구조까지 통제하고 있으니, 한국의 대학은 숨 쉴 여유조차 없다. 선진국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부여해야 한다. 몇 줄 규제로 좋은 학교를 찾는 기본적 욕구를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행여 “부자들만의 세습”이 걱정된다면 소외계층 아이가 들어갈 문을 보완해주면 된다. 그래야 대학도 살아 숨 쉴 수 있고, 공교육의 경쟁력도 높아지며, 모든 국민이 그 혜택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