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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에서 부정당한 국가정체성

입력 2006-05-10 09:41 수정 2006-05-10 09:41

조선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에 홍두승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 4일 주한미군기지 이전 예정지인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일대 영농지역에 군 공병부대가 설치한 철조망이 하루 만에 시위대에 의해 20여 곳이 돌파됐다. 군 숙영시설과 임시초소가 파괴되었으며 장병들의 개인 장비마저 훼손됐다. 이 과정에서 무방비로 시위대를 막아선 군인 30여명이 부상당했다.
군의 시설과 병력이 민간 시위대에 의해 폭력적 방법으로 공격받았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군사시설 부지를 확보, 보호하기 위해 설정한 군사시설보호구역은 철저히 짓밟혀버렸다. 군과 경찰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경찰의 주 임무가 치안유지라면 군은 국가안보를 최일선에서 책임지고 있는 국가의 기간조직이다. 이에 대한 도발은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위대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비무장의 부하·동료 병사들을 보는 군의 사기(士氣)는 크게 위축되고 있다. 또한 시위대와의 충돌이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상황에서 보호 장구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장병들을 투입한 군 지휘부의 판단이 과연 적절하였던가 하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군의 고민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군은 1980년 봄 광주에서 있었던 비극적 사건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그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 그간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던가. “두들겨 맞더라도 민간인과 맞대응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던 군 지휘관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신성한 국방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대한 ‘무고한’ 병사들이 왜 어이없이 맞아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시위대와 맞서야 하는 군인과 전·의경은 병역의무를 필하기 위해 나라의 부름을 받고 복무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요 자식들이다. 나라는 이들 젊은이들이 의무를 마치고 무사히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이들의 안전 보장에 대해서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은 우리 정부가 미국과 합의하고 국회가 비준한 국가적 과제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다. 미군기지 이전으로 인해 이주해야 하는 지역주민들은 생존권 확보를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시위를 주도한 단체의 구호에서 보듯 개인의 신념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구와 주장은 어디까지나 적법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도출된 국민적 합의 사항을 폭력적 방법으로 뒤엎겠다고 한다면 법과 질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말 농민시위 진압과정에서 정당한 공권력을 행사한 경찰총수가 농민의 사망사고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건이 있었고, 그 여파로 경찰은 엄정한 법 집행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공권력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공권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인권은 보장되기 힘들다. 인권과 공권력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오랜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진 선진국에서는 정당한 공권력 행사에 대항하는 것에 대해 가차 없이 제재와 처벌이 가해지고 있다. 합법적 시위와 의견 표출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되 그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리라 본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인권을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이다.

일그러진 시위문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성숙된 민주사회의 모습을 진정으로 보고 싶어한다. 이제라도 정부는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여 이와 같은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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