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0일자 사설 '이정권에선 왜 기업의 재산헌납이 줄을 잇는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현대차 그룹은 19일 검찰 수사와 관련해 정몽구 회장 부자가 소유하고 있는 계열사 글로비스의 모든 주식을 소외계층을 지원하고 불우이웃을 돕는 사회복지재단이 기부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하고 우선 드는 생각은 이 정권 아래서 왜 기업들이 이렇게 재산 헌납 대열에 줄을 서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어느 법에 불법행위를 저지른 기업이 재산헌납을 하면 죄가 씻겨진다는 규정이 있는가. 아니면 대한민국 헌법 23조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와 119조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단지 명목상의 규정일 뿐, 국민의 재산권은 실제론 권력의 의도와 그 권력이 조성한 여론의 반응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인가.

    만일 대한민국이 불법행위와 재산헌납이 얼마든지 교환 가능한 나라라면 이 나라는 법치국가와는 거리가 먼 후진적 ‘인치국가’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헌법상의 국민의 재산권 보장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가 헛말에 지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허울뿐인 민주주의요, 거죽뿐인 자유시장경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사또가 죄인을 불러 곤장을 치면 곳간을 털어바쳐야 했던 봉건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

    지난 2월에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일가가 편법 상속 논란에 대한 사과의 표시로 8000억원을 사회에 헌납했다. 이문을 위해서는 지옥에 내려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는 자본주의하의 기업이 갑자기 자선기관이 되기로 생각을 고쳐먹었을 리가 없다. 그들이 정권의 생각과 정권이 불러일으켜 세웠던 사회분위기와 전혀 관계 없이 1조원에 달하는 재산을 기부했을 리도 없다. 기업이 재산헌납 보따리를 싸들고 줄을 서는 지금의 행태는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이런 기업의 재산헌납 대열에 덩달아 나서고 있는 외국기업들의 행태도 세계에서 처음 보는 일이다.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불법 혐의를 조사 받고 있는 미국계 펀드 론스타도 이날 1000억원을 사회발전기금으로 기부하겠다고 밝혔고, 작년에는 제일은행을 인수했다 매각해 떼돈을 번 뉴브리지캐피탈이 200억원을 내놓았다.

    우리 기억 속에 기업의 재산헌납은 5·16 쿠데타와 5·18 쿠데타라는 두 번의 군사 쿠데타 시기에 있었을 뿐이다. 5·16 때는 군부가 기업인을 잡아 가둬놓고 독재정권과 결탁한 부정축재의 책임을 묻겠다며 강제로 재산헌납 각서를 받아냈다. 5·18 때는 보안사령부의 지하실에서 헌납 각서를 받았다.

    지금의 재산헌납 붐이 ‘자의(自意)’인가 ‘자의 반 타의 반’인가 아니면 ‘강제’인가를 따지기도 어렵고 따져봐야 의미도 없다. 어느 기업이 감히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타의로 돈을 내놓았다고 하겠으며, 자의로 내놓았다고 한댔자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대한민국 헌법에선 기업의 불법행위는 해당 법률에 의해 처벌 받도록 돼있다. 재산의 헌납과 불법행위에 대한 면책을 교환하도록 허용하는 어떤 조항도 없다. 그런데도 이 정권 하에서 기업의 재산헌납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은 분명한 반헌법적 반법치적 흐름이고, 이런 흐름은 이 정권에서 조성된 반자본주의적 반시장적 사회분위기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자유시장 체제는 이윤 추구를 죄악시하는 정권의 반시장적 지향과 자유시장 규칙을 무너뜨리는 기업의 자해적 불법행위라는 양면 공격으로 휘청거리고 있는 셈이다. 평생토록 근로소득세 한번 제대로 낸 적이 없는 인사들이 정권의 중심에 앉아 있는 세상에서 세계에 없는 희한한 재산헌납 풍조가 넘실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한민국이 밖으로 어떻게 비칠지는 물어보나마나 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