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 포천지(誌)가 선정한 2005년 세계 500대 기업 속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국내 기업 11개가 포함돼 있다. 한국 경제의 최강자(最强者)들이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연재 중인 ‘양극화 시리즈’대로라면 이들은 탐욕스런 맹수일 것이다. ‘한국경제는 강자 20%가 약자를 뜯어먹고 사는 구조’라는 게 시리즈 주제다. 밀림의 사자도 배가 부르면 사냥감을 남겨 두는데 한국 경제의 맹수들은 탐욕이 끝이 없다고 했다.

    대기업은 정말 약자를 약탈해 몸집을 키웠으며, 약자를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을까. 2004년 5대 그룹 매출액의 해외 비중은 삼성 70%, 현대차 63%, LG 74%, SK 27%, 포스코 30%다. 대기업들은 주로 해외시장에서 물건을 팔아 외형을 불렸다는 얘기다. 또 지난해 법인세 상위 10대 기업의 납부세액은 6조2000억원이다. 저소득층 146만명의 기초생활보장 예산 4조1000억원을 충당하고 남는 금액이다.

    청와대 논리가 현실과 안 맞는 이유는 경제전(經濟戰)의 게임 방식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국내 운동장에서 국내 선수끼리 치고받는다는 식으로 가정한 것이 문제다.

    국내 대기업의 경쟁 상대는 국내 중소기업이 아니라 해외 초일류 기업이다. 삼성전자는 국내 1위지만 포천 500대 기업 가운데는 39위다. 전자업계만 추리면 지멘스, 히타치, 마쓰시타 전기가 삼성전자에 앞서 있다. 국내 랭킹 2위 현대차는 세계 92위고 자동차 업계에선 13위다.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이면 글로벌 순위가 오르고 법인세도 더 내게 될 것이다. 국내 강자들이 더 강해지면 국내 약자들을 위한 복지 재원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말이다. 청와대 이론과는 반대다.

    저소득층이 살기 힘들어진 이유는 딴 데 있다. 국내 대졸 평균 초임은 연 2000만원인데 중국은 그 4분의 1인 500만원이다. 중국 기업은 싼 인건비에 기대 우리 중소기업보다 훨씬 값싼 상품을 만들어 낸다. 중소기업은 문을 닫거나 저임금 국가로 이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 근로자는 중국 근로자와의 임금경쟁에서 일자리를 뺏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가가치 경쟁으로 맞서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세계화 시대의 경제전은 나라별로 코리안, 아메리칸, 차이나 시리즈가 따로 열리는 게 아니다. 월드 시리즈를 참가자 실력에 따라 메이저, 마이너 리그로 나눠 운영하는 방식이다. 국내 강자는 메이저 리그에서, 국내 약자는 마이너 리그에서 각각 잘 싸우도록 지원하는 게 정부 역할이다. 그런데 청와대는 마이너 리그 선수에게 “메이저 리그 선수가 당신 연봉을 뺏어갔다”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며 국내 선수들끼리 싸움을 붙이려 한다. 스스로 착시(錯視)현상에 빠졌거나 딴 속셈이 있어 국민 눈을 속이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뜯어먹고 산다는 청와대 이론은 세계 시장과 담쌓고 사는 북한에나 딱 들어 맞는다. 북한의 국민 총소득은 208억달러인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은 그 4분의 1인 50억달러다. ‘지도자 동지’가 와인 1만병을 쌓아 놓고, 철갑상어알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공수해 먹기 위해 수백만명의 인민이 굶주리고 있다.

    30년 전 대입 본고사를 보던 시절, 고3 수험생들은 전국 모의고사를 치르곤 했다. 전국 석차를 알기 위해서였다. 대학입시는 전국 수십만 수험생들 사이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학급석차는 관심 밖이었다. 고3 담임은 학생들의 전국석차에 따라 수준별 진학지도를 했다.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반에서 1등 하는 애 때문에 네가 대학에 못 간다”고 말하는 선생님은 없었다.

    청와대는 30년 전 고3 교사들의 진학상담 요령부터 먼저 배울 일이다. “30년 전 대통령은 고교 교장, 지금 대통령은 대학 총장”이라는 낯간지러운 얘기를 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