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란에 이 신문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요즘 프랑스에선 한 여성이 무섭게 뜨고 있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여론조사에서 단연 1등이다.

    몇 개의 예를 들어 보면, 2월 18일 르 피가로 매거진에 보도된 여론조사에서 집권당인 우파의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과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를 누르고 1위에 올랐고, 2월 5일자 일요신문 주르날 뒤 디망슈가 보도한 사회당 대선 후보 대상 여론조사에서도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프랑스에서는 보수 신문 르 피가로와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 여성지 엘르의 커버를 한 주에 같은 정치인이 모두 장식하는 일이 흔치 않은데 이 여성은 한 달 전 그런 기록까지 세웠다.

    마치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듯한 분위기다. 이 여성은 좌파인 사회당 소속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좌파 유권자들은 그를 12년 만에 정권 탈환의 꿈을 실현시켜 줄 ‘잔 다르크’로 여기고 있다. 우파인 자크 시라크 현 대통령은 첫 번째 임기 7년, 재선 임기 5년(개헌으로 임기 단축)을 마치고 내년 퇴임한다. 

    이쯤 되면 한국의 한 여성을 떠올리는 분이 많을 것이다. 차기 서울시장 후보를 놓고 실시되는 여론조사에서 한 여성이 1위를 달리고 있고, 집권당에서 그를 영입하기 위해 목을 매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연상(聯想)이다. 

    프랑스 쪽 여성의 이름은 세골렌 루아얄. 금년 52세. 똑똑하고 야무지다. 빼어난 외모에 매력이 넘친다. 한국 쪽 여성인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도 미모라는 평을 듣는다. 금년 49세. 법무부 장관 재임 시절 똑똑하고 야무진 인물임을 보여 줬다. 외형상으로는 얼추 비슷하다. “프랑스에서 불기 시작한 여풍이 한국에도 왔네”라며 관전자로 나서면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한가하지 않은가. 대통령 후보와 서울시장 후보라는 물리적 격차 때문이 아니다.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양국 선거의 메커니즘 차이가 드러난다. 씁쓰레한 결론이지만 정치의 외형이 아닌 질 차이 같은 것이 보인다.

    루아얄은 다양한 정치 경력을 쌓은 여성이다. 1988년부터 하원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장관도 3차례(환경, 교육, 여성가족장관)나 역임했다. 정치에 관심 있는 프랑스인이라면 그가 어떤 비전을 갖고 있고, 특정 사안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 가족관계를 비롯해서 사생활도 다 알려졌다. 투명하게 드러난 루아얄에 대한 종합적인 인물 평가가 여론조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강 전 장관은 어떤가. 그는 판사와 변호사로 일했지만 많은 국민에게 알려진 건 법무부 장관 재임 1년 5개월에 불과하다. 현재로선 서울시장으로서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아니, 서울시장에 도전하겠다는 결심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깜깜한 상태에서 열린우리당이 그를 출마시키기 위해 구애와 읍소를 한다지만 제3자 눈에는 막무가내 영입 작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강 전 장관이 높이 뜬다고 여성들이 좋아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평소에는 기회를 주지 않다 위기가 닥치자 여성에게 매달리는 얄팍한 정치권의 타산에 분개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의 미래를 ‘주저하는 인기인’의 어깨 위에 억지로 올려놓으려는 집권당의 행태는 1000만 서울시민을 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거철이기는 하지만 정당도, 권력을 노리는 야심가도, 그리고 유권자도 “명성이란 강물과 같은 것이어서 가볍고 과장된 것은 그 위에 떠오르고 무겁고 견실한 것은 조용히 가라앉는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구를 곱씹어 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