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요즘은 표변(豹變)이라는 말이 어떤 사람의 태도가 갑작스레 좋지 않은 쪽으로 바뀌는 걸 표현할 때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믿었던 사람이 의리를 저버릴 때처럼.

    그러나 이 말은 원래 역경(易經)의 군자표변(君子豹變)이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군자는 허물이 있을 때 이를 고쳐 표범처럼 달라져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한다. 군자표변의 대구(對句)로 소인혁면(小人革面)이 있는데 군자는 표변하는 대신 소인은 얼굴만 바꾼다는 뜻이란다.

    김대중 정권에서 명실공히 2인자였던 권노갑씨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씨가 자기에겐 신과 동격인 김 대통령의 면전에서 당시만 해도 하룻강아지인 정동영 의원으로부터 나라를 위해 일선에서 퇴진하라는 직격탄을 맞은 직후였다. 권씨는 자기가 가장 아꼈고 그래서 키우고 싶었으며,평소 말도 없어 얌전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정 의원이 어떻게 저리 표변할 수 있을까 당황하며 한마디도 못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기자는 2000년 12월 초에 보여준 정동영의 이 ‘표변’이 오늘의 노무현 정권을 있게 한 씨앗이었다고 본다. 이를 계기로 권씨의 퇴진과 함께 민주당 정풍운동이 전개됐고,정풍운동은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국민경선제로 이어졌다. 국민경선제는 당시 대세였던 이인제 대신 국민 지지율 2∼3%였던 노무현의 돌풍을 몰고 왔던 것이다.

    그 정동영이 집권 열린우리당을 다시 맡았다. 야당의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에 힘입어 제17대 총선을 여당의 승리로 끝내놓고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으로 경력을 쌓은 뒤 금의환향한 것이다.

    정동영의 열린우리당은 지금까지의 침체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여당다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선 당의장들이 임시관리직 비슷했으나 정 의장은 당에 독자적인 지분을 갖고 있으며,무엇보다도 집권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그에게 힘이 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열린우리당과 정 의장의 앞날이 장밋빛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잿빛에 가깝다할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지방순회에 TV 토론에 법석을 떨며 전당대회를 한대도 국민들은 통 관심이 없고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전당대회 때면 반짝이나마 올라가던 당에 대한 지지율도 20% 안팎으로 변함이 없다. 대선 후보로서의 정 의장에 대한 지지율도 한자리 숫자로 이명박 고건 박근혜 씨 등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정 의장 복귀 후에도 계속돼, 5월 말에 실시될 지방선거에서 지금의 예상대로 열린우리당이 참패할 경우, 정 의장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우는 것은 물론이고 열린우리당의 운명까지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이나 정 의장을 역성들 생각은 없고 객관적으로 봐서 당과 정 의장이 살아남기 위해선 정 의장의 표변이 다시 한번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이념 과잉에 따른 갈등과 분열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정부·여당을 떠나 있다. 떠난 민심을 되돌리려면 지향점을 갈등과 분열에서 국민통합 쪽으로 돌리는 표변이 요구된다. 이 정권의 코드 극복이 필요한 것이다.

    표변엔 여러 위험이 따른다. 그 중 하나가 노 대통령과 사이의 골이다. 대선 가도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대론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최후의 단방약이라도 써봐야 한다.

    여당의 대선 선두 주자인 정 의장은, 이인제씨가 대세였으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씨에게 계속 밀리자 무명에 가까웠던 노무현씨를 대타로 바꿨던 지난번 여당 후보 결정과정을 되돌아봐야 한다. 또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았던 5년여 전 자신의 표변이 여론에 불을 붙여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 상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정 의장을 위해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치 구경꾼이 보기에 상황이 그렇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