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인생을 꿰뚫는 키워드로 ‘역발상(逆發想)’을 꼽은 게 얼마 전이다. 남들과 거꾸로 해서 오늘의 성공을 일궜다는 뜻이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당은 다음 선거만을 의식하겠지만 자신은 그 너머 ‘역사’를 의식한다고도 했다. 18일 대통령 새해 연설의 형식·시간·장소·내용에는 이 ‘역발상’과 ‘역사’라는 두 단어의 그림자가 내내 어른거렸다.

    연설은 대화의 반대 개념이다. 연설은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사람에게로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대화는 이와 달리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 사이에 메시지가 서로 오가는 쌍방향적(雙方向的) 의사소통 수단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새해 국민과 처음 만나면서 대화 대신 굳이 연설을 택했다. 국민과의 의사소통이 번거롭다거나 여의치 않다고 느끼고 있다는 걸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국민과의 거리감 혹은 고립감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대통령 연설의 시간과 장소의 선택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밤 10시 백범기념관’은 국가비상사태 선포라든가 하는 극히 예외적 상황에나 어울린다. 대통령 새해 연설은 낮 시간에 대통령 집무실에서 하는 것이 정상이다. 여기에도 ‘역발상’의 그림자가 너울댄다. 

    TV의 프라임 타임을 골라 시청률을 높이려 한 게 아니냐는 핀잔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국민과의 대화’보다 ‘역사와의 대화’ 쪽으로 기운 대통령에겐 그런 무대가 더 제격이라는 판단이 있었을 수도 있다. 미국 대통령 가운데 TV 프라임 타임 연설을 가장 즐긴 대통령은 닉슨이다. 

    그는 취임 19개월 동안 17시간 이상을 TV 프라임 타임에 나와 연설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3배, 존슨 대통령의 2배였다. 닉슨은 ‘국민과의 대화’보다 ‘역사와의 대화’에 더 골몰했던 대표적 정치인이다. 닉슨이 존경한 드골 프랑스 대통령도 새해 기자회견보다는 새해 연설을 선호했다. 그런 그도 연설이 끝난 다음엔 3명의 기자에게 질문을 허용했다. 

    그래도 그때의 미국은 지금의 한국과는 달랐던 것 같다. CBS방송의 프랭크 스탠튼 사장은 닉슨의 프라임 타임 연설에 대해 백악관이 TV를 독점하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이에 따라 연방통신위원회가 나섰다. 선거기간에만 적용되던 ‘보도의 공정기준’ 조항을 확대해석해 야당에게도 대통령 TV연설과 같은 시간대에 정부 정책을 비판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역발상’과 ‘역사에의 경도(傾倒)’가 가장 물씬 풍기는 것은 연설 내용 자체다. 대통령은 “우리나라 공공서비스 분야 종사자는 선진국의 60%에 불과하다”면서 “작은 정부만 주장할 게 아니다”고 말했다. 이건 정말 대담한 ‘역발상’이다. 

    21세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차베스 대통령의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일부 남미(南美) 국가를 제외하고―이렇게 대담한 ‘거대(巨大)정부론’을 들을 순 없다. 구(舊)공산주의 국가들까지 정부 살빼기에 열심인 게 오늘의 현실이다.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일본 영국 스웨덴은 중앙정부 재정의 절반 이상을 복지에 쓰고 있는데 우리는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복지를 방패 삼아 정부의 지출확대와 증세(增稅)를 주장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선진국 리스트에 경제의 만년(萬年) 우등생이라던 독일과 프랑스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도적 실수’에 버금가는 ‘의도적 누락(漏落)’이다. 두 나라는 지금 복지의 함정에 빠져 10년 넘게 ‘저성장 고실업’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 교과서엔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정부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실질경제성장률은 하락한다”는 ‘프리드먼 비율’(Friedman ratio)이란 게 실려 있다. 정부 지출과 세금을 늘리겠다는 대통령 발상은 이 교과서를 뒤집겠다는 말이다. ‘역발상’ 정도가 아니라 ‘역주행(逆走行)’이라 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이 ‘역발상’으로 성공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 경쟁의 고속도로에서 혼자서‘역주행’하는 눈 먼 나라는 참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대화하는 대통령’이 운전대를 왜 위험 천만한 역주행 쪽으로 틀겠다는 것일까. 그 해답은 기업은 돈을 받고 상품을 팔고, 정권은 표(票)를 받고 정책을 판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잘사는 소수의 사람이 으스스해하는 정책일수록 못사는 다수에겐 더 인기가 있는 법이다. 선거는 당에 맡기고 본인은 역사와의 대화에 전념하겠다던 대통령이 사실은 당보다 더 큰 선거전략을 짜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