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12월 26일 함북 무산시에 어둠이 깔렸다. 72세의 국군포로 한만택씨는 몸을 일으켰다. 도우미 두 명을 따라 늙은 몸 홀로 탈북의 길로 나선 것이다. 겁이나 몸이 오그라든다. 인적을 피하고, 초소를 돌아 두만강에 닿았다. 강폭이 가장 좁은 곳이다. 검은 물 비늘 번득이며 강은 사납게 뒤척인다.

    강물은 노인의 뼈를 얼릴 만큼 차다. 선택은 없다. 탈북 도우미들이 잠수복을 건넸다. 얼음물로 들어선 한씨는 강을 건너 차에 탔다. 한참 뒤 옌지(延吉)의 한 호텔. 형님네 가족들이 무사히 도착했는지 묻는 전화를 해 왔다. 극도의 긴장으로 피곤했지만 개운했다. 적어도 27일 밤 11시 조카며느리 심정욱(52)씨와 통화할 때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왈칵 방문을 따는 소리. 중국 공안이다. 어딘가로 끌려갔다. 거기서 며칠. 이윽고 우악스런 북한 보위부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씨는 무산의 보위부 청사로 끌려갔다. 약 한 달간 맞고 고문당했다. 가족들도 방조죄로 끌려갔다. 각서를 쓰고 풀려나선 가택에 연금됐다. 감시원들이 몇 겹으로 감싼다. 

    그 와중에 서울에서는 약을 보냈다. 20여 일 요양하자 다리만 빼고 고문 후유증은 아물었다. 3월 중순 도우미들이 감시를 따돌린 사이 서울 가족과 휴대전화 접촉을 했다. 조카는 "사람을 다시 보냈다"고 했다. 

    탈출 계획을 다시 짠 가족과 지원단체는 3월 중 두 번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다친 다리 때문에 한씨는 걸을 수 없었다. 차를 동원하기로 했고, 감시자를 떼내려 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잡혀버렸다. 한씨는 4월 23일 북창 수용소 18호에 수감됐다. 가족과 지원단체는 수용소까지 손을 뻗쳐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약 8개월이 지난 지금 심씨는 "생사조차 모른다"고 한숨을 쉰다.

    가족과 지원단체의 말을 종합해 재구성한 한씨의 비극이다. 목숨 건 탈북 과정에서 한씨가 느꼈을 공포의 무게를 상상도 못하겠다. 상황을 개인화하고, 감정을 이입하면 숨이 막힌다. 우리에게 그런 국가 폭력이 발생하면 정권이 무너질 일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은 이 문제를 남북.중국과의 싸움쯤으로 여기며 본질인 인권에는 심드렁하다.

    아프리카에선 가뭄과 내전에 시달리다 국경을 넘는 일이 흔하다. 대부분 인접국 난민 수용소로 간다. 국제사회, 주로 선진국들은 이를 인류 양심이자 인권의 문제로 보고 지원한다. 어느 아프리카 나라도 그런 이유로 탈출했다고 국민을 투옥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 주민에겐 그런 최소한의 '아프리카적 인권'도 없다. 한씨는 국군 포로라 더 조명됐지만 보통 탈북자나 보통 북한 주민의 사정은 더 딱하다.

    그런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까. 방법론을 놓고 갈등이 첨예하다. 소위 '보수'는 압박을, 소위 '진보'는 점진적 개선을 내건다. 미국 정부는 압박 드라이브를 걸 태세고, 한국은 반대한다. 지난주 열린 북한 인권대회의 이인호 공동대회장은 "세계가 다 아는데 우리만 외면할 일이 아니다"고 했다. 정부가 우리 사정만 내세우며 모르쇠처럼 나가면 어려워질 것이란 뜻이다.

    북한 인권 문제가 태풍처럼 몰아치기 전에 정부는 국민적 합의를 모색해야 한다. 북핵 문제도 '평화적 해결'이란 공감대를 토대로 추진되고 있다. 인권 문제에 그런 합의 없이 나가면 국제적 비난은 물론 한미 간, 국내 보수 진보 간의 갈등을 증폭시켜 참여정부가 이룩한 남북관계의 다른 성과마저 훼손될 수 있다. 북한 인권에 대한 대책은 정부가 '따르라'고만 할 게 아니라 국민과 함께 고민할 문제다. 한씨 얘기를 소개한 것도 인권 불모지에서 고통받는 이웃을 환기하고 더불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