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 '시론'란에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1일 드디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노상 들어온, 과거사 청산이 안 돼 나라가 이 모양이라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차례 정리작업은 필요할 것 같다. 다만 이 일이 현재 국정의 우선순위인지에 대해서는 정부와 다른 의견이다. 

    어찌되었든 이왕 시작한 과거사위원회가 직면한 어려움을 헤아려보고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우선 진실 규명 자체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보상이 포함되는 사안이고 보면 어떤 식으로든 사실왜곡을 노리는 움직임이 나타날 것은 뻔한 이치다. 의도적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기억은 ‘망각’과 ‘신화’를 동반하는 불완전한 정신활동이다. 기억에서 신화를 걷어내는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엉뚱한 타인이 고통받는 사례도 생겨날 것이다. 한 세기 동안 큰 줄기를 차지한 사건들의 진실을 4~6년 안에 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한 내에 진실을 모두 밝혀내겠다는 과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과거사위원회는 아마도 은폐된 친일파를 찾아내 징벌하고, 그동안 무시되어온 좌익 독립운동가들을 포상하는 일을 중시하리라 추측된다. 여기서 식민지적 지배는 ‘복종’과 ‘저항’을 동시에 요구하는 대단히 복잡한 현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친일과 독립운동이라는 양극적 행위의 원인 제공자는 사실 고종과 그를 둘러싼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이었다. 이번 기회에 국망(國亡)의 최종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아마 기억에 묻힌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는 작업보다 더 중요할 것이며, 국민의 막중한 신임을 위임받고 국가 역사의 5년을 책임지는 오늘날의 위정자들에 대한 경종도 될 것이다.

    과거사위원회는 또한 이승만정권 이래 역대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 탄압의 경우들을 구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일 것 같다. 중요한 점은 그 일이 인류 보편적 가치 위에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주의적 관점이나 이념적 편향을 벗어나 ‘인도주의적 가치’를 염두에 둔 판단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파나 대한민국 정부뿐 아니라 광복 후나 6·25전쟁 중에 좌파나 북한 정권에 의해 자행된 인권 탄압과 침해에도 눈을 돌리기 바란다. 좌익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은 인정하면서 좌익이 저지른 과오는 외면한다면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동시에 6·25전쟁 동안 자행된 인권 유린이 조사 대상이라면,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확실히 하는 것도 위원회의 임무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한 것은 균형 잡힌 역사관이며 ‘후세에 태어난 자의 오만함’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 눈에는 명명백백한 과정이지만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는 안개 자욱한 새벽과 같았을 것이다. 따라서 잠시 헤매었다고, 잠시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해서 우리 잣대로 비난을 퍼부어서는 안 된다. 서양에서 수세기 동안 진행된 전제왕정에서 민주주의로의 길을 우리는 10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겪어냈다. 짧은 시간에 고속으로 달리다 보면 일어나는 사고가 어디 한두 건이겠는가. 나라 만들기라는 관점에서 볼 때 광복 후 50년의 역사는 바람직하지 않다 해도 이해는 되는 과정이었다.

    자, 과거사위원회의 노력으로 ‘진실’이 다 규명되었다고 치자. 그럼 ‘화해’는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와 비슷한 위원회를 발족시켰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과 프랑스, 프랑코 사후(死後)의 스페인, 피노체트 몰락 후의 아르헨티나 등 다른 나라의 경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첫째, 과거는 한번 ‘정리’된 채 조용히 남아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과거의 망령은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둘째, 진실 규명이 사회 각 집단 간의 갈등과 반목만을 야기한 채 국민의 내적 성찰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삶의 복잡다단한 과정에서 사람들은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온 국민이 이해하고 인정할 때 진정한 화해는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