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혁, 한반도국제포럼서 북한 인권 실상 국제사회에 고발"학생들 강제노역으로 재배한 곡식, 대부분 '군량미' 돼 사라져""아버지는, 탈북 친구와 통화하다 '노동단련소 4년형' 받고 복무하다 아사할 뻔""두만강 건너도 中 공안에 잡히면 강제북송… 총살 혹은 정치범수용소행""탈북여성, 중국서 인신매매돼 물건처럼 팔려… 어린 나이에 강제 출산""북한의 미래가, 한반도의 미래가 여러분에게 달렸다" 호소
  • ▲ 탈북 청년 김일혁 씨가 30일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통일부와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가 개최한 한반도국제포럼(KGF)에서 연설하고 있다. ⓒ조문정 기자
    ▲ 탈북 청년 김일혁 씨가 30일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통일부와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가 개최한 한반도국제포럼(KGF)에서 연설하고 있다. ⓒ조문정 기자
    "신고하면 오빠의 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갈 것이 뻔한데 그래도 신고해야 했을까. 고모와 그 어린 자녀들에게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나?"

    최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개최한 북한인권 공개회의에서 북한 독재자 김정은을 향해 "독재는 영원할 수 없다"고 일갈해 화제가 된 탈북 청년 김일혁 씨가 자신의 가족의 탈북을 보위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고모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30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통일부와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가 개최한 한반도국제포럼(KGF)에서 가족의 탈북 과정에서 고모가 겪어야 했던 고초를 언급하며 북한 인권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고발했다.

    김씨는 "저희 가족이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올 때 고모가 집 앞에서 '잘 가'라고 배웅해줬다. 그 사실을 북한 보위부에서 알게 됐고 저희 가족이 한국으로 가는 것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모를 몇 개월 동안 감옥에 가두고 갖은 고문과 구타를 했고 끝내 정치범수용소로 끌고 갔다"고 전했다.

    눈가가 붉어지고 목이 메이는 듯 목소리가 갈라지던 김씨는 이 말을 끝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연단에서 잠시 뒤를 돌아 숨을 고르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고모의 죄는 한국으로 가는 오빠의 가족을 신고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김씨는 그러면서 "그때 고모에게는 세 살 된 딸과 다섯 살 된 아들이 있었다. 그렇게 고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어린아이들과 생이별했다. 신고하면 오빠의 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갈 것이 뻔한데 그래도 신고해야 했겠는가"라며 "고모와 그 어린 자녀들에게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북한 당국이 어린 학생들에게 가하는 강제노역 실태도 고발했다. "노동현장에 가지 않으면 힘겹게 노동하는 같은 반 친구들을 전부 저희 집으로 보내서 저를 데리고 오도록 시켰다. 그렇게 학교에 불려 나가면 담임이라는 자가 술을 잔뜩 먹고 와서는 일하러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자를 들어 머리를 내리치고 발과 주먹으로 폭력을 쓰고는 했다. 그렇게 우리의 피눈물을 모으고 수확된 대부분의 곡식은 군량미로 가져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겨울에 무엇을 먹고 살아남아야 할지에 대한 걱정뿐이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아버지가 한국으로 먼저 탈북한 친구와  통화하다 보위부에 발각돼 노동단련소에 끌려간 사건도 소개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한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는 이유로 '노동단련대 4년형'을 받고 단련대로 끌려가셨다. 그곳에서는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끌려간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꼭 면회를 가야 했다. 면회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아사(餓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아버지가 해주시는 이야기들은 당시 14살이었던 제가 듣기에는 너무 참담했다. '며칠 전에 한 사람이 죽었다. 어제도 한 사람이 죽었다'와 같은 이야기였다. 그곳에서는 배고픔 때문에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해안가에서 말라버린 미역을 너무 많이 주워 먹은 탓에 그 미역들이 뱃속에서 부풀어 배가 터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느 날 아버지가 자다가 몸이 너무 가려워서 깼는데 옆에서 자고 있던 사람이 이미 죽은 상태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자다가 깰 정도로 몸이 가려웠던 이유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 몸에 있던 기생충들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이동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그러면서 "그런 상황에 처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가족은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다행히도 아버지는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실 수 있었다. 하지만 저의 가족은 그때부터 보위부의 끊임없는 감시하에 살아야 했다. 아버지의 친구를 통해서 탈북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보위부에서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차 안에서 감시하고, 옥수수밭에 숨어서 감시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자고 있는데 집 안에 들어와서 창문 밑에서 감시하기도 했다. 이웃들을 시켜 우리 가족에게 이상한 움직임이 있는지 감시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밧줄로 묶은 손이 마치 잘려 나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두만강을 통해 중국으로 건너간 김씨는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목숨을 건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고 회상했다. "중국 공안에 잡히면 북송된다. 북송되면 총살당하거나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을 때까지 강제노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그래서 중국 공안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말을 못하는 척 연기해야 했다. 사물함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렇게 목숨을 건 긴 여정 끝에 무사히 한국에 안전하게 도착했다"고 밝힌 김씨는 "지금도 중국 내에서 많은 탈북민이 구분돼 강제북송될 위험에 처해 있다. 또한, 중국 내에 있는 많은 탈북민 여성이 인신매매를 당해 물건처럼 팔리고 있다. 10대 어린 나이에 팔려와서 강제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탈북민들의 죄가 있다면 북한정권 밑에서 태어난 것, 그것이 죄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런 비인륜적인 일을 당해야 하는가. 국가가 그들을 지켜줬더라면, 먹고 살 수 있게만 해줬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주민들은 굶주리고 있지만 북한정권은 그들을 위한 어떤 정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북한주민의 피와 살을 빨아 먹으면서 그들만이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고 주민들의 피와 땀을 모아 하늘에 미사일을 날리고 있다. 그 미사일 하나를 날릴 돈이면 북한 주민들이 3개월 동안 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주민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정권을 유지하는 것에만 연연하며 핵을 만들고 선전선동하며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김씨는 "저는 더이상 이런 비인륜적인 일이 북한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를 북한사람들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전 세계를 여행하면 다른 세상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도 자유롭게 여행하며 여러분과 만나서 북한 체제에 대해서, 국제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며 청년들을 향해 "북한의 미래가, 한반도의 미래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