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방군'선발대, 환영 시민들의 태극기에 전원 서명소련군은 짐승, 한-일 여성들 집단 습격...강도질 만행소련 군정이 태극기 폐기, 북한기 만들어 사용 지시
  • ▲ 진귀한 태극기--1945년 9월8일 인천에 처음 진주한  미군선발대 48명이 환영나온 시민들로부터 받은 태극기에 전원 서명하였다. ⓒ이현표
    ▲ 진귀한 태극기--1945년 9월8일 인천에 처음 진주한 미군선발대 48명이 환영나온 시민들로부터 받은 태극기에 전원 서명하였다. ⓒ이현표
    요즘 부쩍 해방군이라는 단어가 인기 검색어로 등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점령했다, 따라서 미군과 소련군은 점령군이었다. 

    그러나 국내 일부에서 소련군은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이었고, 미군은 말 그대로 점령군이라고 억지를 부리니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제로는 미군이 해방군이었고, 소련군은 매우 악랄한 약탈군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별난 태극기 하나를 보기로 하자! 

    태극기의 맨 위 좌측에는 모래시계가 그려져 있고, 그 오른쪽에는 “한국에 상륙하다. 1945년 9월 8일”이란 영어가 보인다. 그 아랫줄에는 2소대, A중대, 제32보병연대라고 쓰여 있다. 그 아래에는 인천이라는 글귀가 있다. 그리고 태극기의 네 괘 사이에는 48명의 영어 이름이 빼곡하다.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는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린다. 그러나 이 날은 우리가 형식적으로 해방된 날이다. 실질적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은 미군이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진주하여 이튿날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위에서 본 태극기는 인천에 최초로 상륙한 미 제24군단 제32보병연대 A중대 제2소대 장병 48명 전원이 우리 동포가 건넨 태극기에 친필로 서명한 것이다. 그러면 몇 사단일까? 태극기의 맨 위 좌측의 모래시계는 미 제7보병사단을 상징하는 로고이다.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태극기라는 화폭을 미군 병사들이 정성스럽게 디자인 해 놓은 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나아가 세로 69cm, 가로 81cm 크기의 이 태극기는 한반도의 해방과 관련해서 많은 것을 말해 준다. 

    태극기에 서명한 미군 병사들은 일본 침공을 위해 오키나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 핵폭탄이 투하됨으로써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한국으로 파병된 병사들이다. 
  • ▲ 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은 한국에 진주한 미군에게 가이드북을 만들어 교육시켰다.ⓒ이현표
    ▲ 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은 한국에 진주한 미군에게 가이드북을 만들어 교육시켰다.ⓒ이현표
    미군사령부는 한국으로 가는 장병들에게 한국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하기 위해서 <KOREA-A POCKET GUIDE>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만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76쪽 짜리 소책자에는 한국인은 누구인가, 한국의 종교, 도시들, 자원과 무역, 화폐, 위생, 언어(한영 필수어휘) 등이 담겼다. 

    장병들은 이 책을 의무적으로 읽은 것 같다. 필자가 소장한 이 책의 뒤쪽 여백에 책을 읽은 병사들의 이름이 여럿 적혀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소책자는 한국에 점령군으로 가게 되는 (미군 제24군단 장병) 여러분에게 한국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위해서 마련되었다. 

    한국은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영토 약탈의 일환으로 병탄되었고, 이후 야비한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일본인으로 동화되지 않고, 여전히 한국인이다. 그들은 미국과 미국인을 존중하고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만 한다. 

    동양인과 관계를 맺을 때는 거칠게 대하지 말고, 확고하며 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들은 천부적으로 자존감이 대단히 강하고, 친밀한 성격을 싫어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평범한 미국인의 심성에 내재된 관대함을 약점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위대하고 존경받는 나라인 미국,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전투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린 연합국의 힘과 정의와 민주주의의 대표로 한국에 가게 된다. 우리의 행동이 한국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를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국가(the principal liberating nation)의 훌륭한 대표로 인정할 것이다. 

    나는 미군 장병 모두가 조국의 예의 바르고 충실한 대표라는 마음가짐으로 행동해 줄 것을 굳게 믿는다. 여러분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르거나 부주의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막는데, 이 소책자에 담긴 정보가 유용하게 사용되기 바란다."  
                                         존 알. 하지 중장, 미군 제24군 사령관 

    미군은 전쟁을 하고 점령을 해도 이런 식으로 하는 나라다! 필자는 48명의 미군 장병 모두가 하지 사령관의 지시대로 조국의 예의 바르고 충실한 대표라는 마음가짐으로 정성스럽게 태극기에 서명했으며, 한국을 해방시키기 위한 점령군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것으로 믿는다.
  • ▲ 미군선발대 베네디토 병사의 증언.ⓒ이현표
    ▲ 미군선발대 베네디토 병사의 증언.ⓒ이현표
    미군이 해방군이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1945년 9월 8일 태극기에 서명했던 미군들과 같은 날, 인천에 상륙했던 미 제7보병사단 제17보병연대 소속 마리오 베네디토 일등병의 회고가 그것이다. 

    “나의 이름은 마리오 “벤” 베네디토입니다. 1945년 9월 8일, 나는 미 육군 일병으로 많은 병사들과 함께 한국에 상륙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일본 침공을 위해 오키나와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핵폭탄이 투하됨으로써 일본을 침공하는 대신에 한국의 해방을 위해서 그곳에 파병되어 점령했습니다.(We were sent to Korea for the liberation and to occupy it.) 우리는 미 제7보병사단 소속이었고,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일본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오랫동안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야비한 일본인들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 공격은 삶의 절정기였던 내게 더할 나위 없이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징집되었고 어느 부대로 갈지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기꺼이 육군에 입대했으며, 미국 국민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서 신이 났습니다. 

    그때 유럽에서의 전쟁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조지아주 휠러 캠프 훈련소에서 보병훈련을 받았으며, 15주 후 유럽에 교체인력으로 투입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하여 우리 모두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 직후 유럽의 전쟁은 종식되었습니다.
    우리는 훈련을 받고 매릴랜드 포트 미드로 갈 때까지 10일 간의 휴가를 얻었습니다. 포트 미드에서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부분의 동료들과 분리되어 서쪽 해안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체류한 후, 나는 정글 훈련을 받기 위해서 하와이 오하우로 갔습니다. 오하우에서 2주 동안 훈련을 마치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대형 수송선을 타고 떠났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오키나와에 착륙했으며, 나는 제7보병사단(사단 로고는 모래시계 문양임) 제17보병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싸울 기회를 놓친 것을 알고 허탈했습니다. 우리가 참전하기 전에 오키나와 전투는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가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여러분도 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독일인과 일본인들을 파멸시키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어쨌든 그때는 오늘과 다른 시기였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일본 침공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1945년 8월 핵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며칠 후에는 나가사키에도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전쟁이 끝나가고 있어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나이 많은 병사들은 가산점을 받아서 제대했으나, 신병인 우리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낯설고 신비한 나라인 한국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나는 한국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치 우리가 적을 침공하는 양상이 펼쳐졌습니다. 해안에 일본장병들이 우리에게 그들의 무기를 양도하려고 도열해 있었거든요. 

    야비한 일본인들은 한국을 40년 이상 점령했으며, 한국인들에게 매우 잔혹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들의 잔학한 행위들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도착하던 첫 날, 어떤 한국 단체가 일본인들을 살해, 참수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영어 전단지를 우리 모두에게 주었습니다.


  • ▲ 인천시민단체가 미 해방군에게 전한 감사와 일본군 처형을 요구한 호소문. ⓒ이현표
    ▲ 인천시민단체가 미 해방군에게 전한 감사와 일본군 처형을 요구한 호소문. ⓒ이현표
    <미군에게 호소문>

    새 세대의 영웅들인 여러분, 우리 20만 인천시민은 여러분이 오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하는 것을 일본군이 막았습니다.  
    여러분은 고귀한 목숨을 바쳐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패퇴시켰습니다. 여러분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우리는 세계의 평화, 자유, 정의를 위한 투쟁의 열정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일본인들이 방해해도 진심으로 여러분들을 환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분은 어제 오후에 우리가 거대한 시위를 한 것을 보셨나요?
     오, 세계평화의 사도이신 여러분.
    우리는 일제 경찰에게 총을 맞았고, 살해되었으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일제는 어떻게 그토록 잔인한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구상의 다른 곳에서 그러한 사건을 보셨나요? 이는 여러분의 동료와 연합군에게 엄청난 치욕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국가의 국민들은 일제의 이런 행위를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여러분의 소중한 동지와 형제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합니다. 

      1. 우리는 일본군의 즉각적인 무장해제와 그들을 사형에 처할 것을 바랍니다.
      2. 우리는 행정권과 일제의 재산을 즉시 양도받기를 원합니다.
      3. 우리는 세계 평화와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가능한 빨리 실현되기를 되기를 희망합니다. 

                                                        조선노동조합 제물포 지부
  • ▲ 1945년 9월8일 처음 한국에 진주하였다가 1971년 철수한 미7보병사단 발간 책자.
    ▲ 1945년 9월8일 처음 한국에 진주하였다가 1971년 철수한 미7보병사단 발간 책자.
    한국인들은 정말 일본인들을 증오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한국인들의 요구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일본병사들을 무장해제시키고 배에 태워서 일본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여러분, 만약 사정이 정반대였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 지 한 번 상상해 보세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핵무기를 투하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결정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일부 수정주의적 사관을 가진 저술가와 역사가들이 이러한 트루먼의 결정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보지도 않았던 자들입니다. 

    그때 나는 야비한 일본인들과 전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희생자들이 엄청 생겼을 것이기 때문에 트루먼의 명령은 대단한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만약에 일본인들이나 독일인들이 핵무기를 먼저 개발했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오늘 이곳에 살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전쟁 전에 우리가 한국에서 지냈던 시기는 재미없고 따분했던 때입니다. 우리 중대는 항상 이동했으므로 신선한 음식을 거의 공급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남부에서 38선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 저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한국인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절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언어(영어)를 읽고 익히도록 도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음식을 달라고 하면 주었고, 일부에게는 숙소를 제공했으며, 기타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위대한 나라를 건설해서 살고 있습니다. 예전의 진흙길, 우마차, 화장실로 사용되던 길 양쪽의 도랑들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엄청나게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발전해 가면서 우리에 대한 그들의 고마움은 서서히 줄었습니다. 우리가 당시 한국에 갈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갔어야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미 제7보병사단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해방군으로서의 임무를 성공리에 마치고 철수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한국에서 3년 동안의 역할을 담은 책자를 발간했다. 많은 사진이 실린 이 책에서 미 제7보병사단은 그들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 주한미군 7사단은 아리랑곡에 가사를 붙인 행진곡을 만들어 불렀다.ⓒ이현표
    ▲ 주한미군 7사단은 아리랑곡에 가사를 붙인 행진곡을 만들어 불렀다.ⓒ이현표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훨씬 전에 결정되었다. 미국, 소련, 중화민국(공산화되기 이전의 중국) 등 세 강국이 여러 차례 회의를 통해서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본국으로 송환시키기 위해서 한반도를 점령하기로 했던 것이다. 38선은 장차 그런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책임 구역을 구분하는데 필요한 선이었고, 그 임무는 8주에서 12주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미군이 1945년 9월 8일 한국에 도착했을 때, 한국인들로부터 일본을 정복한 영웅으로 환영받았고, 화려한 의전행사가 거행되었다. 미군 제17연대, 제32연대, 제184연대 등 3개 연대로 구성된 제7보병사단은 도착 즉시, 책임구역으로 파견되어 점령군으로서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제32연대는 38선에 배치되어 경계 연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점령 초기의 몇 주 동안은 38선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상당한 친선관계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곧 소련은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그랬듯이, 한반도에도 ‘철의 장막’을 드리웠다. 이로써 38선은 국경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무장한 군사경계선이 되어버렸다.

    제17연대는 한국의 수도인 서울 남부지역에 배치되었으며, 그 관할지역이 꽤 넓었다. 

    제184연대는 서울과 그 주변지역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맥아더 장군과 함께 필리핀 남부 바탄 섬 방어전에 투입되었다가 포로가 됐던 제31연대가 재소집되어 1946년 1월 제7보병사단에 편입됨과 동시에 제184연대와 임무교대를 했다. 제184연대는 캘리포니아 국경경비대로 복귀했다. 

    한국에서 제7보병사단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1) 미 군정의 점령 업무 지원
     2) 38선 경계와 북한주민과 소련인의 불법적인 38선 남하 방지
     3) 북한 게릴라들의 남한 시설 혹은 미국인과 미국 시설 공격 보호
     4) 북한의 피난민 처리
     5) 제7보병사단 병사들의 전투 훈련과 병사들 개개인에게 무의식적으로 극동에서 미국의 대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 고취

    미군의 한반도 점령은 다른 지역에서 직면했던 문제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다양하고 많은 문제들에 직면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4,000년의 문명을 자랑한다. 그러나 당시의 한반도는 낙후되고, 개발이 되지 않았으며, 가난에 시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제에 의해서 40년 동안 자연 자원과 인적 자원을 철저히 약탈당해서 나라가 완전히 거덜 났다. 

    한국인들은 배우려는 마음이 매우 간절했지만, 짧은 시간 내에 서양의 문화를 흡수할 수는 없었다. 주거시설은 미군 장병들에게 적합지 않았고, 오락과 휴게시설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소련의 철의 장막 때문에 한반도가 산업시설이 많은 북한과 농업 중심의 남한으로 비정상적으로 분단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군은 한민족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강구했으나, 소련군에 의해서 모조리 좌절되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부자연스런 상태에 놓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됨으로써 미군의 주요 임무는 사실상 성취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는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했으나, 소련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 준비를 위한 위원들의 북한 방문을 거부했다. 그 결과 한국은 유엔의 지지와 후원을 받아서 남한과 그 부속도서에서만 선거를 실시했다.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을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대단히 존중했다. 남한에서의 생활수준과 경제는 일제 점령시대보다는 상당히 개선되었다. 미군이 점령을 통해서 한국에 가장 크게 기여한 점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사고와 행동과 언론의 자유를 갖도록 해준 것이다.  

    미군 제7보병사단은 훈련과 교육을 매우 효율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미군 중에서 최고의 정예부대로 평가받았다. 한국에서 3년 동안 점령과 전투를 통해서 남긴 기록은 혁혁하며, 이는 장교와 사병들에게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제7보병사단은 극도로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았고, 맡은 바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함으로써 높이 칭찬받아 마땅하다.” 

    참고사항: 미 제7보병사단은 6.25전쟁에도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북으로 진격하여 압록강까지 진군했다. 총 850일 동안 공산침략자들과 전투하는 동안, 사상자가 15126명(전사: 3905명, 부상: 10858명, 실종 등: 363명)이나 되었다. 

    미 제7보병사단은 휴전 후, 군사분계선에서 방어임무를 수행하다가 1971년에 완전히 철수했다. 특히 이 사단은 1956년부터 우리 민요 아리랑의 멜로디에 영어 가사를 붙여서 행진곡으로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 동독에서 발간된 책자 <2 X KOREA>에 등장하는 김일성ⓒ이현표
    ▲ 동독에서 발간된 책자 <2 X KOREA>에 등장하는 김일성ⓒ이현표
    소련군은 악랄한 약탈군

    소련군은 한민족의 국기인 태극기를 폐지시키고, 인공기를 국기로 사용하도록 북한에 강요했던 약탈군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는 감추어 졌다가, 붕괴 후인 1990년대 초에 마침내 드러났다. 

    1993년 9월 26일 동아일보는 ‘북한 인공기, 구소련이 만들었다’라는 제목으로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러시아동포 박일 교수의 증언을 소개했다. 박 교수는 광복 이후 북한 공산화를 위해 소련에서 북한에 파견되었으며, 김일성대학(1946년 10월 1일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으로 설립)의 부총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더욱이 박 교수는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의했고, 당시 북한 정치를 총괄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1901~1992년) 소장의 통역을 담당했었다. 그런 그가 증언한 인공기 제작 과정은 매우 구체적이고 충격적이다. 

    1947년 여름, 레베데프로부터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그의 사무실에 가 보니, 김일성대학 총장 김두봉이 와 있었다고 한다. 레베데프는 머잖아 북한에 나라를 세우려면 국기가 필요할 텐데 김 총장의 의견을 듣고 싶으니 통역을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두봉이 태극기에는 우주의 원리 등 역학적 의미가 담겼고, 한국의 전통이 반영되었으니 국기로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자, 레베데프는 ‘우룬도르’(вздо́р: 동아일보는 ‘우룬다’로 표기), 즉 ‘황당무계한 말마시오’라고 힐책했다는 것이다. 

    몇 달 후, 평양주둔 소련 제25군 사령부를 통해서 북한에 인공기 도안이 건네졌으며, 박일 교수가 북한인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줬다는 증언이다. 

    참고로 김두봉은 인공기 제작에 깊이 관여했으며, 1948년 초 태극기 폐지 이유들을 설명하는 중에 ‘태극기가 주역에 바탕을 두어 비과학적’이라고도 폄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대구매일신문은 1995년 1월 1일부터 2월 28일까지 레베데프비망록을 24회에 걸쳐서 연재했다. 동 연재물 제20회(1995년 2월 18일)에는 레베데프가 1948년 4월 15일 김일성에게 인공기와 인민군기를 제작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북조선 인민회의는 1948년 7월 8일, 해방 직후부터 사용해 오던 애국가와 태극기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7월 24일부터 태극기 대신에 인공기를 시범 게양했으며, 9월 9일 북한정권수립을 공식 선포하고, 인공기를 공식 국기로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소련의 태극기 약탈은 소련군이 북한에서 행한 그 어떤 인적・물적 약탈보다도 훨씬 악랄하고 중대한 만행이다. 국기는 국가의 상징이다. 소련이 태극기를 약탈하고 인공기를 하사한 행위는 국권 탈취와 다름없다. 이러한 무도한 약탈군을 해방군이라고 하는 자들이 제정신인가?

    남의 나라의 국기를 약탈할 정도면, 소련군의 약탈의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대학인(大學人)’으로 존경을 받았던 전 고려대학교 김성식(金成植, 1908-1986) 교수는 <다시 보는 태극기-8.15 해방>이란 제목의 글에서 소련군의 약탈행위를 다음과 같은 생생하게 소개했다. 
  • ▲ 북한에 들어오자마자 약탈,성폭행, 폭력등 만행을 저지른 소련 점령군.
    ▲ 북한에 들어오자마자 약탈,성폭행, 폭력등 만행을 저지른 소련 점령군.
    “조선의 해방은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을 점령함으로써 이뤄졌다.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1945년 8월 하순까지 북한에 진주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미군을 남한에 파병함으로써 1945년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했으며 다음 날 중앙청에서 조선총독의 항복을 받아냈다. 

    38선이 어떻게 설정되었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1945년 2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참석한 얄타회담에서 미・소 간의 ‘일반적 양해(general understanding)’가 이뤄졌을 것으로 본다. 

    소련군은 8월 하순, 북한에 진주를 완료하자마자, 각 도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른바 조선인의 정권 집단을 만들어서 일제로부터 행정권을 위탁받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바뀌었다.

    이후 5개 도의 인민위원회는 1945년 11월 6일 ‘북조선 행정국’으로 통일되어 조만식이 책임자가 되었으나, 3개월 후인 1946년 2월 소련은 김일성에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케 하여 김일성 중심의 정권 체제를 성립시켰다. 그와 동시에 조만식은 연금되고, 모든 것이 김일성의 독재로 기울어져 갔다. 

    소련은 약 63,000명의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이들을 모두 억류하여 시베리아나 기타 점령 기지에 보내서 노역에 종사케 하였다. 만주나 북한에 있던 일본인 관리들도 모두 억류되어 노역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들이 일본으로 최종 귀환된 것은 1949년이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면서 북한의 산업시설을 철거해 갔으며, 각 공장의 기계와 부속품을 뜯어 갔다. 소련군 병사 약 3,000명은 수많은 트럭을 동원해서 수풍댐의 발전기 3, 4, 5기를 해체하여 가져갔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자동차들도 실어 갔다. 

    소련군은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북한에 있던 사람들은 돈이나 집이나 기타 재산보다도 부녀자의 겁탈을 제일 무서워했다. 그래서 돈을 거두어서 직업여성으로 하여금 소련군의 위안부 노릇을 하게 했다. 개중에는 소련군의 강간을 막다가 살해된 사람도 있었고, 특히 일본인 여성에 대해 심해서 그들은 조선인 가정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행인들의 손목시계를 빼앗아 2∼3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군 병사들도 있었다. 살해된 사람의 돈과 귀중품을 훔치는 것은 물론, 금니까지 뽑아 갔다. 이러는 동안에도 북한 공산당은 소련군을 조선의 해방군이라며 그들에 대해서 일언반구 불평을 하지 못했다.

    북한 동포는 이런 소련군의 약탈을 견디다 못해서 100만 명이나 남한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일본인 이재민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했다. 

    북한과는 반대로 남한에서는 미군이 진주한 뒤, 일본인을 보호했다. 그리고 미 군정은 민주주의를 한다고 공산당과 민족주의 정당을 용인했다. 그러자 남한에서는 공산주의가 팽창해서 여기저기서 폭동사건이 일어나고, 급기야 6.25전쟁의 비극까지 빚어냈다. 남한의 공산주의는 미군정에서 자라서 불가사리처럼 되었고, 이윽고 미군의 탄압이 있었으나, 뿌리는 박힐 대로 박힌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