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 혁신' 일본식 오류 들어와… "반일" 외치는 자칭 '진보세력'이 무분별하게 사용
  • 우리나라처럼 정치·사상 용어들이 부정확하게 혼용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촛불 혁명(집회)', '5·16 혁명(쿠데타)', '제주4·3 항쟁(폭동)', '동학 혁명(반란)' 등 같은 사건을 놓고, '긍정' 혹은 '부정'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서로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주의 지향적 혁명운동을 하는 좌익세력을 '진보운동가'로 추어올리고, 사회주의에 반대하면서 변화지향적인 우익세력을 '수구보수', 또는 '극우세력'으로 폄하하는 일도 다반사다.

    또한 '자유주의적'이라는 뜻의 '리버럴(liberal)'을 '진보적'이라고 오역해 사용하거나, 과격한 혁명은 반대하지만 점진적 변화(진화)를 지지하는 '보수주의'를 '모든 변화에 반대하는 사상' 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게다가 혁명운동권이 사용하는 용어 속에 '민족'이나 '민중', '민주주의'가 들어갔다고 해서,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자유민주주의'와 부합한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인 동시에 인식과 사유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생활에서 사용되는 용어들과 그 용어들의 의미는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물인식과 사상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이에 따라 어떤 국가에서 정치·사상 관련 용어들이 부정확하게 사용되면, 그 나라 국민의 정치상황 인식과 사유도 혼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정치·사상 용어 바로 알기(양동안 지음, 도서출판 대추나무 刊)'를 쓴 저자는 국민의 정치상황 인식과 사유가 혼란스러워지면 그들의 정치·사회적 행동이 부적절해질 수밖에 없고, 국민의 정치·사회적 행동이 지속적으로 부적절하게 되면 국가의 운명은 '재앙'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국가가 재앙을 피하려면 정치·사상과 관련된 용어들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진보(혁신)-보수 구분법, 일본에서 유래


    저자는 이런 상황이 초래된 이유는 일부 사상운동세력이 적대세력과 대중에게 자기들의 사상적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치·사상 관련 용어들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돼왔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는 좌익혁명세력이 스스로를 '진보세력'으로 부르고, 자기들에 반대하는 세력을 '보수세력'으로 호칭하면서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가 '좌익'과 '우익'을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운동권에 동조적인 언론계 종사자들이 그러한 호칭법을 추종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좌·우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어졌다. 운동권은 좌익·우익 호칭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수구꼴통 극우분자로 취급했다. 그 결과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에서 기피 용어가 되고 말았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가 기피 용어로 된 배경에는 일본도 단단히 한 몫을 기여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정치세력을 분류·호칭함에 있어서 좌익·우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혁신세력'과 '보수세력'으로 호칭했다.

    '우익'과 '국수주의세력'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확산돼 사상적으로 우익에 속하는 인사나 세력이 자기들에게 우익이라는 명칭이 붙는 걸 기피하는 풍조가 생겨났고, 좌익으로 불러야 마땅한 세력이 '혁신세력'으로 불리는 기이한 현상이 초래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1960년대 이후 그러한 일본식 정치세력호칭법이 우리나라에 유입됐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신문 잡지를 구독하는 '지도층 인사'들이 일본적인 정치세력호칭법을 '선진적인 것'으로 착각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서 잘못된 용어가 뿌리내리게 됐다는 게 저자의 논리다.

    반일노선을 추구하며 일본에 배타적인, 소위 '진보세력'이 즐겨쓰는 정치세력호칭법이 일본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촛불집회가 '혁명'이 될 수 없는 이유


    저자는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혁명'이라는 용어를 즐겨쓰는 이유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지지했던 세력은 이를 촉구하기 위해 모인 촛불집회를 '촛불혁명'이라고 추어올렸고, 문재인 정권의 퇴진을 촉구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모인 이들은 자신들의 집회를 '태극기 국민혁명'이라 불렀다.

    저자는 이들이 혁명이라는 단어가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긍정적이거나 명예로운 함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혁명을 즐겨 사용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혁명은 정치변동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광범위한 변동 형태로, 통상 통치체제의 전복과 교체를 핵심사업으로 추진한다. 그런 이유로 혁명은 반드시 기존 헌법의 대대적인 개정이나 새로운 헌법 제정을 동반한다.

    따라서 국가통치권 장악 후 기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다른 체제로 바꾸지 못한 촛불집회는 혁명이 될 수 없다.

    같은 논리로, 관군을 제압할 정도의 강력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외형항 혁명과 유사한 '동학란'도 그 투쟁이 실패했기 때문에 반란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상하고 거창한 목적을 추구했더라도 '실패한 봉기'는 반란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전 세계 사상적 '역사'와 '계보'가 한 눈에


    '정치·사상 용어 바로 알기'는 정치·사상 분야의 권위자인 저자가 우리 사회에서 매우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보수와 진보', '좌익과 우익',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등 다양한 정치·사상 용어들을 명쾌하게 정리한 책이다.

    용어뿐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참여민주주의' 등 다양한 사상들의 발생과정과 계보, 역사적 변화과정을 마치 게놈지도를 펼쳐내듯 보여준다.

    특히 최근 미국 대통령선거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미국의 사상적 갈등의 역사적 뿌리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혁명' '쿠데타' '반란' 등 한국에서 남용되는 용어들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통해 소모적인 논쟁을 종식시키는 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저자 양동안


    1945년 전남 순천시(구 승주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언론계에 투신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 1975년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언론계와 학계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는 중앙대 강사로 활동했고, 조선대학교, 경기대학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의 교수로 일하면서는 경향신문 및 세계일보의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8년 여름에는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을 발표해 국민들에게 당시 한국사회에서 활동하던 좌익혁명세력의 동향과 위험성을 경고했다. 1990년대부터는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접고 학문연구에 집중했으며, 학문연구 틈틈이 여러 월간지들에 한국사회의 사상적 동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글들을 많이 발표했다. 2009년 25년간 재직해온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퇴임했다.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다.

    주된 연구영역은 정치이데올로기, 혁명론, 한국현대정치사 등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정치현실(삼화출판사, 1989)', '대한민국 건국사(현음사, 2001)', '민주적 코포라티즘(현음사, 2005)', '사상과 언어(북앤피플, 2011)',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연구(백년동안, 2016)', '벼랑 끝에 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인영사, 2017)', '대한민국 건국전후사 바로알기(대추나무, 2019, 교보문고 역사문화분야 베스트셀러 1위)' 등이 있다.